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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윤활

2024년 9월 1일 일요일 / 제인 에어

by 글섬

원한을 품거나 원통한 생각을 꼬박꼬박 외워 두기에는 인생이란 너무 짧은 것 같아.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지난 일요일 늦은 오후에 수개월 고대하던 연주회가 있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과 스위스 로잔 챔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이었는데 평소 눈여겨 봐왔던 첼리스트 한재민의 협연에도 기대가 컸다. 공연 이틀 전에 갑자기 프로그램 순서를 변경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만큼 르노 카퓌송의 애정도 나 못지않았던 듯하다. 베토벤 로망스 1번과 2번의 순서를 뒤집어 2번부터 시작했는데 상대적으로 좀 더 대중적이고 감미로운 선율의 2번이기에 신의 한수였다.


원래는 저비용 연주회만 골라 보기 때문에 난 주로 KBS 교향악단이나 서울시향 연주회 단골이었다. 평소에도 거의 온종일 클래식을 들으며 사는 터라 굳이 고가의 연주회까지 누려야 할 이유도 경제적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해에 운 좋게도 서울시향 연주회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리사 바티아쉬빌리가 협연하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경험한 뒤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세계적'이라 함은 그에 준하는 비용을 지불할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객석 조명이 어두워지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감동이었다. 그들의 면면이 그 자체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백발의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여유로운 자태로 들어오는 그들은 내 기억 속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던 25년 전 유럽의 예술을 소환했다. 25년 전 체류 중이었던 빠리를 떠나 혼자 누렸던 유럽 도시들 중에 독일의 아주 작은 마을이 있었다. 일부러 관광객들이 가장 뜸한 도시만 골라 돌아다녔던 나의 의중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는데 그 조그만 마을(우리나라 같으면 남해의 어느 읍 정도 될 듯하다.)에도 매주 주말엔 클래식 공연이 있었다. 대부분의 유럽이 그러하듯 독일 역시 아무리 작은 마을일지라도 자체 교향악단과 오페라단을 운영하며 매주 마을회관 같은 소극장에서 주민들을 위한 공연을 진행했다. 내가 머물렀던 주말에는 오페라 아이다 공연이 있었고, 당시 나는 4천 원 정도의 비용으로 객석에 앉았다. 그때까지 내가 즐겼던 오페라는 화려한 무대와 의상이 매우 큰 몫을 했던 공연이었던 터라 그런 조그마한 마을 자체 공연팀의 수준이 자못 궁금했다. 그들은 누가 주연이고 누가 앙상블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남녀 구분 없이 똑같이 무지의 홈웨어(?) 같은 포대 자루 의상을 입고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의상이 지나치게 심플하니 오히려 공연 집중도가 높아졌다. 노래 역시 소도시 공연팀답게 소박한 발성이었지만 그 소박한 무대를 대하는 공연자와 관객의 진지함과 여유로움에 나는 충격을 받았었다. 마치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연을 듣는 듯하달까. 진지하고 집중적이되 긴장감보다는 여유로운 '누림'의 자태를 보며 클래식 공연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했던 오래전 기억을 소환해내는 스위스 로잔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자태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예술이 저렇게 피부와 같은 표정의 사람들은 정말이지 간만이었다. 보여주기가 아닌 누림의 예술은 보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운다.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한 르노 카퓌송은 반구형 오케스트라 정중앙에 자리잡고 위치하자마자 현을 들어 지휘와 동시에 연주를 시작했는데(르노 카퓌송은 스위스 로잔 챔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기도 하다.), 첫 음과 동시에 나는, 아, 이런, 하며 입이 쩍 벌어지더니 뭔가를 생각할 틈새도 없이 그만 눈물이 솟구쳤다. 무형의 음이 오로지 음 자체로 끌어내는 그 감동은 내 짧은 필력으로는 언제나 감당할 길이 없다. 마치 그리고리 소콜로프와 글렌 굴드의 음반을 듣고 있자면 저건 피아노일 리 없어, 뭔가 다른 음을 내잖아, 저렇게 투명한데 피아노에 무슨 짓을 한 걸까, 등등의 생각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데, 실연은 뇌를 거치지 않고 곧장 폐부를 뚫는 힘이 있으니 뇌가 의문을 갖거나 설명하려 들기 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한 결과이다. 도대체가 바이올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감미로움은 눈물 없이 감당할 수가 없다. 로망스 2번이 꿈처럼 끝나버리고, 1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또 어떤가. 그들의 면면만큼이나 완벽한 연주를 이어갔다. 챔버 오케스트라임에도 불구하고 대편성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소리를 냈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실수 없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며 서로의 합을 이끌어낼 때 얻을 수 있는 완전함이다. 양보다 질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꿈처럼 베토벤 로망스가 끝나고 가장 기대했던 베토벤 삼중주가 시작되었다. 베토벤 삼중주에서 상대적으로 주요한 역할인 첼로를 중앙에 배치하고 르노 카퓌송이 그 좌측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협연을 이어가는 구도였는데, 아직 어려서일까. 뜻밖에도 한재민이 협주가 아닌 독주 스타일에 취해 오케스트라, 바이올린과 박자가 미묘하게 어긋났다. 노련한 르노 카퓌송이 파트를 넘겨 받을 때마다 속도를 재조정하며 지휘와 연주를 이어갔지만 피아니스트 이진상도 그만한 노련함은 없어서 이 아름다운 삼중주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당겨지기를 반복하느라 그만 우그러졌다. 2악장이 특히 그러했다. 아마도 한재민은 르노 카퓌송이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동안은 지휘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매번 깜박했던 것 같다. 협연자는 당연히 독주 스타일로 연주를 주관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지휘자가 협연자를 살펴 오케스트라를 그에 맞게 끌고 맞추게 되어 있는데, 이처럼 협연자가 지휘를 겸하는 경우엔 지휘자가 연주하는 동안에는 없는 셈이므로 협연자들 사이의 합이 더욱 각별히 요구된다. 그런데 아마 그날이 이들의 전국 투어 첫 연주회라서 합을 맞춰볼 여력도 거의 없었을 듯하다. 첼로 천재로 불리며 승승장구 중인 연주자였는데 나로서는 안타까움이 컸다. '세계적'이라 함은 이렇듯 멀고 험한 길이다.


2부는 완벽했다. 앞선 연주의 아쉬움을 만회하려는 듯 특히 관악기들의 완벽한 호흡과 연주로, 상대적으로 낯선 라벨과 프로코피에프 교향곡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해주었다. 격렬한 커튼콜과 친절한 앵콜 무대를 끝으로 공연장을 빠져 나온 뒤에도 나는 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격한 감동을 쪼개어 보도 블록에 뿌리느라 느릿느릿 걸어야 했다. 연주회 감동 못지않게 늦여름 밤 바람이 더할 나위 없었다. 일요일만 아니라면 화이트 와인이 간절해지는 밤이었다.


나를 고양시켜주는 아름다움에 지불해야 할 여력도 부족한 생이다. 그리 소중한 여력이니 고통스러운 기억에까지는 내주지 말자, 싶어도 상처에 좀 더 쏠리기 마련이다. 괜스리 뾰루퉁하거나 시무룩해지는 날에는 이 밤의 아름다운 기억을 소환해 상쇄해야겠다. 팍팍한 일상을 윤활하고 내일로 나아가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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