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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들에 대하여

관성과 자극의 장력

by 글섬

얼마 전 구직사이트를 통해 면접 제안이 왔다. 반색한 마음에도 화상 면접을 진행한다는 절차에 갸웃했지만, 뭐 워낙 전국구 기업이니 굳이 본사 면접이 필요한가 보다, 여겼다. 간절함은 쉬이 혼돈의 기폭제가 된다. 인사팀이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해야만 화상 면접이 가능했는데, 고릿적 아이폰을 쓰고 있는 나로선 설치 불가능했다. 아이폰 버전을 알린 뒤 인사팀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뒤늦은 의혹이 강한 깨달음으로 자동 업데이트 되었다. 1시간 가량의 폭풍 검색 끝에 역시 피싱이었음이 밝혀졌다. 카카오톡 업데이트마저 제외 대상이 된 낡은 아이폰이 나를 지켜낸 순간이다.


그 외에도 나는 많은 낡은 것들에 둘러쌓여 지낸다. 아날로그 멋짐을 구현할 목적이 전혀 아니다. 일테면 아직 멀쩡한 유선 이어폰을 굳이 무선으로 바꿔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다. 심지어 유선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왼손에 쥔 채 러닝머신에서 뛴다. 불편함에 대해서라면 당근 불편하다. 하지만 겨우 한두 시간의 편의를 위해 멀쩡한 나머지 일상을 새로 재편할 여력은 없다. 그런 여력은 다른 데 써야 마땅하다. 여력마저 낡아가는 나로선.


현관에 선 채로 한 번, 옷을 갈아입으며 또 한 번,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한 번, 포기를 고민한다. 다른 모든 토요일과 다름 없이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이렇게 나를 다독이거나 속여서 헬스장에 끌어다 놓은 세월이 무려 20년이다. 여러 날 컴퓨터와 씨름해 납기를 맞추느라 2시간밖에 못 잔 날이나 가벼운 수술을 치른 뒤에도 어김없이 나를 질질 끌어다 체육관 문턱을 넘게 했다. 관성으로 다다른 낡음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결과물을 쥐여준다. 그건 매끄러운 바디라인이나 체중계 숫자와는 차원이 다른 남다름이다. 무언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남다름이니.


어찌되었든 오늘도 그 많은 '끌어다 놓음'의 하루였다. 나의 피로감을 감안해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치고 빠지리라 다짐하며 세트 수를 세는데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귓가로 울컥 쏟아진다.

지금 어디 운동하시는 거예요?

질문 자체에 깃든 힐난을 감지한 나의 대답은 저절로 마침표를 잃는다.

뒷다리일껄요..

그러자 바로 그거, 라는 식의,

그러니까 데드 리프트 하시는 거죠??

라는 질문이 뒤를 잇는다. 차마 알면서 뭘 물어, 할 수는 없어서,

아마도..

라고 답한다.


새로 들어온 트레이너의 회원 확보용 맛보기 데드 리프트 강의가 이어진다. 친절하다. 적확하다.

음, 굿~


트레이너가 사라지고, 혼자서 새로 익힌 자세를 반복해 익히는 동안 문득 궁금해진다. 무려 20년. 그 시간 동안 시종일관 나는 같은 자세로 운동했다. 사실 상체든 복근이든 20년 마이웨이 웨이트라면 자세랄 게 이미 없다. 겨우 유튜브 정도로 교정하는 중간 점검마저 밥벌이 피로감에 밀려 5년에 한 번씩도 빠듯했다. 얼마 전엔 기존의 트레이너가 문득 나의 상체 운동 자세를 바로잡아 줬는데 교정한 자세에 따르면 난 20년 동안 어깨 운동을 하지 않았던 셈이 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러할까. 20년이라면 트레이너가 운동을 익힌 시간보다 긴 시간이다. 물론 적확한 자세로 운동하는 건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운동은 몇 시간 하는지보다 어떤 운동을 어떤 자세로 하느냐의 싸움이다. 하지만 20년이라면 관건은 달라진다. 운동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20년이라면 문리가 틔이게 되어 있다. 그게 내가 믿는 시간의 힘이다.


게다가 내겐 PT를 거부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트레이너는 개인의 특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 적어도 우리 동네 트레이너들은 그렇다. 젊은 시절 하드 워킹으로 망가진 내 목이나 무릎은 상당히 예민한데 트레이너는 제 몸이 아니니 알 턱이 없다. 목이 망가지면 밥벌이마저 요원해지는 개인 사정까지는 구구절절하기 싫다. 당연히 마이웨이가 된다. 한때 진료 받았던 정형외과 재활 운동과 유튜브 검색을 통한 요가 자세에다 웨이트를 적절히 배합한 나만의 구성으로 운동한다. 당연히 전문가 눈에는 묘할 것이다. 자세를 잘못 교정하면 그날 밤은 목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한다.


관성으로 낡은 것들은 자극이 이룰 수 없는 궁극에 이미 다다랐을 수 있다. 시간이 가닿는 큰 그림이다. 당장 눈앞을 가린 아름다움에 취하면 긴 시간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지점은 요원해진다.


매일 새롭거나 적확하지 않아도 된다. 자극에 갇히면 관성은 요원하다. 모든 걸 프로의 영역으로 밀어 넣으려다 오히려 아마추어로 남느니 시간의 힘을 빌어 보자. 어차피 오래 살아야 할 일, 올바른 관성이 차라리 프로다. 불편하거나 부정확하더라도, 반질반질 윤기가 나지 않더라도 괜찮다. 오늘 하루 더 나를 이겨 관성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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