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Clair de lune) - 1

1882년 / 최정수 옮김

by 글섬

작품 배경


〈달빛(Clair de lune)〉은 1882년 7월 1일자 《르 골루아(Le Gaulois)》 지에 처음 발표된 소설로, 1899년에 모파상 사후 단편집 〈밀롱 영감(Le Père Milon)〉에 수록되어 출간되었다.


모파상은 1882년 10월 19일자 《질 블라스(Gil Blas)》 지에 동일한 제목의 내용이 다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쥘리 루베르(Julie Roubère) 부인은 언니 앙리에트 레토레(Henriette Létoré)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위스(Suisse)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레토레 부부는 약 5주 전 여행을 떠났었고, 앙리에트는 남편 혼자 칼바도스(Calvados)에 있는 그들의 영지로 돌아가게 했다. 거기서 사업상 중요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파리의 여동생 집에 들러 며칠 머물기로 했다.


마침내 초인종이 울렸고, 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성대한 여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두 자매는 얼굴을 마주하는 즉시 격한 포옹을 나눴다. 잠시 입맞춤을 하려고 포옹을 풀었다가 즉시 다시 껴안곤 했다.


앙리에트가 베일이 드리운 모자를 벗는 동안 두 사람은 앞다투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의 건강과 가족들에 대해 묻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성급하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대화가 끊기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루베르 부인이 종을 울려 램프를 가져오게 했다. 램프가 오자 그녀는 한 번 더 언니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려고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혀 버렸다. 레토레 부인의 관자놀이에 흰머리가 두 가닥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고,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 이후 갑자기 그렇게 된 일이었다. 루베르 부인은 아연실색해서 꼼짝 않고 언니를 바라보았다. 뭔가 불가해하고 끔찍한 불행이 덮쳐 오기라도 한 듯,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루베르 부인이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앙리에트는 아픈 사람 같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도 아니니 안심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루베르 부인은 언니의 양어깨를 와락 붙잡고는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달라고 거듭 말했다.


두 여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앙리에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이 파리해지더니,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시선을 떨구었다. 동생이 거듭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종용하자, 앙리에트는 체념한 목소리로 애인이 생겼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더니 동생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조금 진정이 되자, 앙리에트는 성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려는 듯,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여인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응접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베르 부인은 언니의 목에 팔을 둘러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앙리에트는 남편을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남편은 분별이 넘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서 여자 마음의 부드러운 떨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선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친절하게 굴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한 신사의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가 가끔씩 남편이 그녀를 그의 품에 와락 끌어안고 부드러운 키스를 천천히 해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두 존재를 하나로 결합해주는, 말 없는 속내 이야기와도 같은, 그런 키스 말이다. 또 그가 연약하게 자신을 그녀에게 내맡기기를, 그녀와 그녀의 애무를 갈망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물론 이건 어리석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렇게 연약하고 어리석은 게 사실이다. 여자들은 너무 쉽게 굴복하고, 아주 쉽게 사랑에 빠진다. 아주 하찮은 일로도 마음이 약해지고, 갑작스럽게 감상적인 기분이 찾아들기도 한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은 어느 순간이 오면 모든 여자들이 느끼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속일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모든 건 루체른(Lucerne) 호수 위를 비추던 달빛 때문이었다.


남편과 함께 여행하던 한 달 내내 그녀는 남편의 냉정한 무관심 때문에 여행의 감흥이 깨지고 흥분도 가라앉아 버렸다. 어느 날 해가 뜰 무렵 부부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서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투명한 아침 안개 속에서 긴 계곡, 숲, 강, 마을들이 보이자 그녀는 황홀한 마음에 손뼉을 치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자기를 좀 안아주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어깨를 조금 으쓱하더니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띠며, 경치가 마음에 드는 게 포옹을 할 이유가 되느냐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그녀는 마음속까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녀로서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감동적인 풍경을 마주할 때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한층 커지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당시 그들은 나흘 동안 플뤼렌(Fluelen)의 어느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로베르(Robert)가 두통이 조금 있다면서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혼자서 호숫가로 산책을 나갔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밤이었다. 둥근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서 빛났고, 눈 쌓인 커다란 산들은 은빛 모자라도 쓴 것 같았고, 호수는 물결을 일렁이며 반짝였다. 대기는 온화하고 포근하게 스며들어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정신이 혼미하고 감동스러웠다. 그 순간 마음이 한껏 예민해지며 전율이 느껴졌고,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한껏 조여지는 듯했다.


그녀는 풀밭 위에 앉아 우수 어리고 매혹적인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상한 감정이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욕구가 솟아났다. 그건 아마도 음울하고 단조로운 그녀의 삶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달빛에 잠긴 호숫가를 따라 사랑하는 남자의 품 안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인간들의 사랑을 위해 신께서 만드신 감미로운 밤에 연인들이 나누는 깊고 달콤하고 정신을 멍하게 하는 입맞춤을 한 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여름날 저녁의 환한 그늘 속에서 정신없이 두 팔을 벌리고 열에 들떠 포옹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미친 여자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때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떤 남자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 사람이 다가와서 그녀에게 우시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젊은 변호사였다. 어머니와 함께 여행 중이었고, 레토레 부부와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의 눈길이 그녀를 좇는 것을 여러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불편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점잖은 태도로 그녀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녀가 느끼는 모든 것을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고 전율했던 모든 것을 그도 그녀처럼, 아니, 그녀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뮈세(Musset)의 시구를 읊어 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산들, 호수, 달빛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주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그 이유도 모르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일종의 환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로 말하자면... 다음날 그곳을 떠날 때 한 번 더 본 게 전부였다. 그가 자신의 명함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레토레 부인은 동생의 품 안에 힘없이 쓰러지며 흡사 울부짖음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동생 루베르 부인이 명상에 잠긴 표정으로 진지하게, 매우 부드럽게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그리고 그날 밤 언니의 진정한 애인은 달빛이었던 것 같아.”




▶ 발췌 문헌 : 〈기 드 모파상〉, 모파상 저, 최정수 역, 현대문학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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