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인의 고백

1882년 / 전혜경 옮김

by 글섬

작품 배경


〈어느 여인의 고백(Confessions d'une femme)〉은 1882년 6월 28일자 《질 블라스(Gil Blas)》 지에 처음 발표된 소설로, 1899년에 모파상 사후 단편집 〈밀롱 영감(Le Père Milon)〉에 수록되어 출간되었다.




나의 벗이여,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 적 있었지요. 나는 친척도 자식도 없는, 고독하고 초라한 늙은이랍니다. 그래서 모든 걸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 이름만은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그러나 지금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렇다고 해도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사랑이란 정신적 생활에 불가결한 것입니다. 나로선 사랑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들은 흔히 진실한 사랑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내게는 이따금 열렬한 사랑이 찾아들었기 때문에 사랑은 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정열의 불꽃은 장작이 떨어진 난로처럼 언제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허무하게 꺼져버리곤 했지요.


오늘 나는 당신에게 내가 아주 순진했던 시절에 겪은 사건들 중에서 최초이지만 그 다음 사건들의 원인이 되었던 경험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 당시 나는 에르베 드 케르(Hervé de Ker) 아무개라는 백작과 결혼식을 올린 뒤였습니다. 부자였고, 브르타뉴의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이긴 했지만 그는 내가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타입의 남자였습니다. 남편은 키가 크고 품위 있고 관대한 사람이었지만 융통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고, 의견을 말할 때도 항상 칼로 자르듯이 단호한 태도였답니다. 결코 주저하거나 당황하는 법이 없었고, 어떤 일에도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죠.


우리는 황량한 고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었지요. 음산한 느낌을 주는 그 저택은 거목들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고, 수심이 깊은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원은 정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숲처럼 나무들이 울창했습니다. 그 정원 끝에는 갈대와 수초로 우거진 두 개의 큰 연못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두 연못 사이를 이어주는 개울가에다 아담한 오두막집을 짓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야생 오리를 잡기 위한 사냥터였지요.


고정된 하인들 이외에 남편은 충직한 사냥개처럼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듯 보이는 시종 한 사람을 데리고 있었고, 내게는 밤낮없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거의 친구 같은 하녀 하나가 있었습니다. 나는 5년 전에 그녀를 스페인에서 데려왔었지요. 그녀는 버려진 아이였어요.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색,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숱 많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집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스무 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숙했답니다.


가을이 되자 남편은 그 고장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주 우리 집에 모여서 그날의 사냥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그 중에서 나는 C 아무개라는 젊은 남작을 눈여겨보았지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우리 집 방문 횟수가 잦았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발길을 끊었고, 나도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남편의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말수가 줄었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예전과 같은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나의 요구로 우리는 각방을 썼었는데, 나는 밤마다 내 방문 앞까지 살금살금 왔다가 서서히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듣곤 했지요. 그러나 나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답니다. 내 방이 아래층에 있었기 때문에 저택을 순찰하는 하인들의 발자국 소리라고 생각했죠.


어느 날 저녁, 그날따라 유난히 쾌활해 보였던 남편이 저녁식사를 마치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밤마다 우리 집 암탉을 훔치러 오는 여우가 한 마리 있는데 오늘 그놈을 잡으러 갈 생각이라고 말하며, 그런데 나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끈질기고 집요하게 요구했기에 나는 할 수 없이 그러자고 했지요.


남편이 여우 사냥을 가자고 내게 제안한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 뒤부터 남편이 이상하리만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더군요. 그러더니 저녁 내내 열에 들뜬 듯이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였어요.


열 시가 되자 남편이 직접 내 총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조용히 현관문을 빠져나와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이 음산한 느낌을 주는 우리의 낡은 저택을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저택 옆에 세워져 있는 두 개의 망루 꼭대기에 붙어 있는 금속판도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지요. 죽음처럼 온화하면서도 무거운 밤의 적막이 대기를 짓누르고, 바람은 잠잠했습니다.


남편은 사냥의 흥분에 사로잡힌 채 온갖 주의를 다 기울여 주위를 살피며 사소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연못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도 수면 위로 달빛만 가득할 뿐, 무거운 정적이 짓누르고 있었지요.


우리가 오두막집에 다다르자 남편은 천천히 자신의 총에 총알을 장전했습니다. 그때 덜거덕거리는 냉혹한 장전 소리에 나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어요. 약 반 시간을 꼼짝 않고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가 여우가 지나가는 길목이 틀림없냐고 물었지요. 남편은 틀림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긴 침묵이 흐른 뒤 남편이 갑자기 내 팔을 흔들면서 저기 나무 아래를 좀 보라고 속삭이더군요. 하지만 내 눈에는 칠흑 같은 어둠뿐,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침착하게 어깨 위로 총을 올려놓았고, 나도 총을 쏠 준비를 했지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우리가 매복해 있는 오두막에서 약 30보쯤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환했기 때문에 나는 그걸 볼 수 있었어요. 그는 도망치듯이 몸을 구부린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처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불꽃이 내 눈앞을 스쳐갔고, 고요한 어둠을 뒤흔드는 그 커다란 총소리에 나는 그만 아찔해졌습니다. 잠시 후에 나는 총에 맞은 짐승처럼 땅에 뒹구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그때 남편의 격노한 손이 내 목을 움켜잡더군요. 내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그는 억센 팔로 나를 들어 올려 어깨에 둘러메고는, 시체가 쓰러져 있는 풀밭 쪽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러더니 내 몸이 부서져라 그 시체 위에다 사정없이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이미 그는 내 이마 위로 자신의 발뒤꿈치를 쳐들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순간 그가 어떤 발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제정신을 잃고서 심하게 떨고 있는 내 하녀 파키타(Paquita)가 미친 듯이 남편에게 달려들어 그의 턱수염과 콧수염, 그리고 얼굴을 사정없이 잡아 뜯으며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말이지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남자의 시체 위로 몸을 던지더군요. 마치 애무라도 하듯이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고서 그의 눈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더니, 죽은 자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열고 그곳에서 연인의 숨결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이없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남편은 그제야 내 발밑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몹쓸 시종 놈이 자신을 속였다고, 나의 애인인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하녀의 애인을 죽이고 말았다고 탄식했습니다.


나는 야릇한 심정이 되어 이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의 키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망이 없는 사랑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그녀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나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답니다.




▶ 참고 문헌 : 〈모파상 단편선〉, 전혜경 역, 혜원출판사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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