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환상에 갇힌 어른 아이들의 성장기
'나'라는 환상에 갇힌 세 명의 어른 아이들의 성장기.
'나'는 거대하다. 언제나 나를 우선한다. 오직 '나'만을 이고 진 세 사람이 혼자서는 감당해낼 수 없는 무적의 '나'를 서로 삿대질하고 깎아대다가 비로소 나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대입을 목전에 둔 다 자란 어른 아이 하나, 바튼 고등학교 담장 밖으로는 평생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살아온 교사 어른 아이 하나, 군대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만이 삶의 이유인 학교 급식 주방장 어른 아이 하나.
이들 세 사람은 크리스마스 연휴 2주 동안 학교에 남게 된다. 원래는 연휴에 귀향하지 않는 다섯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들 중 항공사 사장 아들은 아버지의 이발 요구를 거부하고 장발을 고집하느라 징벌 차원으로 남겨졌던 터라 연휴 시작 하루만에 마음 약한 아버지가 헬리콥터를 타고 도착해 아들의 친구들까지 스키장으로 초대해 다 같이 태우고 떠난다. 책임 교사 폴이 학생들의 부모와 교장의 허가를 받기 위해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했는데 재혼 여행을 떠난 털리의 어머님만 전화를 받지 않아 털리만 남겨진다.
고집불통 세 사람이 모여 난장을 치는데 제각각 자기 자신에 갇혀 있다. 털리는 자애롭던 아버지가 언제부턴가정신병에 지배 당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뒤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그 자신도 아버지처럼 정신병을 얻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지배 당한다. 폴은 우수한 성적으로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전에 둔 시점에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렸는데 정작 논문 표절자는 폴이 아니라 동일한 논문의 상대방이었다. 막강한 힘의 아버지를 둔 동급생이 폴의 논문을 표절하고는 폴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게 진실이었지만 동급생 아버지의 힘에 가려 끝내 밝혀지지 못했고, 폴이 퇴학 조치되자 폴의 우수함과 무죄를 유일하게 믿어주신 선생님이 바튼 고등학교에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 뒤로는 세상을 원망하고 바튼 고등학교와 같은 부유층 자제들을 혐오하면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 뒤로 숨어 지낸다. 급식 책임자 메리는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군대 지원금을 타기 위해 군대를 자원했던 아들이 군에서 사망하자 죄책감을 덜기 위해 아들의 죽음에 집착한다. 세 사람 모두 자애를 잘못 익혀 타자의 흠집으로 위안을 얻었기에 전교생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꼴통들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시인은 참 옳기도 하다. 고집불통 꼴통도 한 공간에 묶여 서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니 비로소 예쁘다. 아프지 않은 생은 없다. 누구도 생의 묵직한 농담의 표적을 피해 갈 수 없다. 생이 내게 던진 농담이 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아 있는 목숨이라면 개미 한 마리도 다 아프다. 내 몫이 아니었던 아픔에 집중하는 동안 내 몫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내 얼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일그러진 내 얼굴로 인해 심지어 다른 누군가가 아프거나 다치게 되면 결국 그 상흔마저 다시 내 얼굴이 되고야 만다.
어쩌면 내가 집착하는 '나'는 환상이다. '나'를 몰라서도 탈이 나지만 '나'만 보아서도 탈이 난다. '나'로 향하는 길은 필생의 과업이기에 아직 도달했을 리도 없고 어쩌면 영영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한 '나'인데 어떻게 '나'만 보고 간단 말인가. 대체로 나는 틀릴 수 있다. 사는 게 어려운 일인 게, '나'를 믿어주는 마음과 의구심을 동시에 품고 돌다리도 연신 두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이기에 어른이 되기란 또 어찌나 요원하기만 한지. 자라는 내내 '나'에 갇히느라 제각각 어른인 척만 하는, 모두가 아이들이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읽고 이를 직시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모두가 어른이 된다. 나와 타자가 공존할 수 있는 여백이 어른의 얼굴이다.
'나'만 보고 각자 걷던 세 사람이 타인의 '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나'를 벗어나 '나'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의 밑그림을 그리려다 보니 아무래도 영화 초반부가 늘어진다. OTT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의 오류가 발생하기 딱 좋은 영화이다. 영화가 30분이 지나도록 별다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리모콘의 정지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오류 말이다. 나 역시 지인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정지 버튼을 누를 뻔했다. 클로징 화면에서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반성했다. 영화든 책이든 일종의 길을 떠나는 개념이니 그 길의 끝에 도달해야만 교차로든 연결 도로든 나타나게 된다는 믿음을 되새기게 되었다.
또 다른 단상. 세 배우 모두 단적으로 못생겼다. 주인공 맞아? 할 지경의 외모들인데 이 역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사람의 예쁨 혹은 그 너머의 아름다움은 역시나 시각적인 요소가 아니다. 특히나 메리 역할의 여배우는 왜 때문에 그렇게 멋지실까나. 1971년 시대 배경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거의 2인분에 가까운 묵직한 체형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패션 감각을 보여주신다. 예전에 다른 영화에서 봤던 모습보다 살이 더 찐 상태였는데 바로 그래서 아들을 잃고 탐닉했을 우울한 나날들을 정확히 대변해준다. 못생김을 기꺼이 감내하다 못해 자원하는 배우들과 이들의 모습을 주문하는 외국 영화 현장에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