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2

by 글섬

수많은 2030 세대 젊은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고 정평이 난 애니였기에 OTT 상영일만을 고대해왔다. 캐렉터 불안이에 대한 공감으로 울었다고 익히 들었다. 울 준비로 대기만 타다간 그만 영화가 끝나 버렸다. 어디서 울어야 했다는 거지?? 때마침 젊은 지인이 카톡을 보내왔기에 물어보았다. 뭔가를 이루고 싶은 열망으로 불안해 하다가 그 불안이 결국 자신을 좀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깨닫고 불안이 완화되는 결말 부분에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아등바등 달려 사회에 자리잡기 위해 애를 써왔던 자신의 노력이 되돌아봐지며 울었던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흠. 그렇다면,


일단 불안은 자신을 좀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다. 불안은 그저 불안이다. 영화에서는 라일리가 하키에서 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남보다 일찍 일어나 연습하고, 심지어는 감독의 선수 평가 노트를 훔쳐 보는 등의 행위의 요인으로 불안이를 밀고 나갔지만, 불안은 대개 전후 인과가 없다. 불안은 평화만을 지향하지는 않는 우리 마음의 본질 중 하나이다. 우리 마음은 의외로 평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불안은 영화에서처럼 긍정적인 마음 상태에서 기인하는 감정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불안은 그 자체로 악한 감정이고, 그 자체로 생기고 지양될 뿐이기에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감정이다.


게다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감독의 노트를 훔쳐 보는 부정 행위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지나쳐버리는 스토리 흐름은 매우 위험하다. 이 영화가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면 더욱 그렇고,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도 물론 그러하며, 청춘들을 위한 영화라면 매우 그렇다. 명백한 부정 행위가 어떻게 불안이라는 감정 상태로 면죄된단 말인지 나만 이상하다는 게 더 이상하다.


이왕에 '사춘기'라는 빨간 경고등을 켜기로 마음먹었다면, 캐랙터 또한 빈약하다. 2편에서 추가된 캐랙터인 불안이, 부럽이, 따분이, 당황이 등은 모두 어느 정도 긍정적인 감정 상태에 기반하고 있어서 캐랙터 설정 관계자들이 혹시 사춘기 자녀, 혹은 본인의 사춘기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경험해본 적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굳이 '사춘기'를 타겟팅하겠다면, 삐딱이, 우쭐이, 짜증이, 싫증이, 미움이, 무조건 안하리, 같은 좀 더 완벽한 부정적 감정 상태에다, 우울이, 만족이, 엉큼이, 괜히 신남이, 등등 뭐라 이유도 알 수 없는 모호한 감정 상태까지 사용해 좀 더 풍성한 스토리 라인이 필요했을 듯하다. 뭐, 그렇지만, 영화가 굳이 그렇게까지 사실적일 필요까지는 없고, 더욱이 애니매이션 영화이니 어느 만큼의 단면화는 영화적 요소로 이해된다.


그런데 '자아'에 대한 설정은 다소 마뜩찮다. 긍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마음, 다양한 감정과 기억 들이 모두 합쳐져서 자아로 형성된다는 결말 부분은 무척 근사하지만, 긍정적인 자아만으로 구성되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이 뿌리째 뽑혀 기억 저편으로 내던져졌을 때 기쁨이가 '자아'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덕분에 어린 관객들에게는 마치 자아라는 게 긍정적인 마음만으로 부각될 우려가 있다. 기쁨이가 찾으러 갔던 대상을 '자아' 대신에 '첫마음'이나 '첫자아' 등으로 세분화해서 명명했다면 나중에 온갖 마음과 노력의 결실로 피어나는 자아가 좀 더 공고히 빛이 났을 것 같다.


처음으로 돌아가, 2030 세대 젊은이들의 눈물 버튼에 대해서는, 일단 부럽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울어야 할지 몰랐던 건 '열망했던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갖고 싶은 어떤 것이 있었고, 그걸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밤낮없이 불안해하고 노력했던 자들의 특권 같다. 나는 그저 열심히는 살았는데, 뭘 그렇게까지 열망하지는 않았다. 그럴 새도 없었다. 사느라 바빠서. 그렇다면 역으로 젊은 세대가 다소 한가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히려 이미 많이 가지고 이미 많이 누렸기 때문에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을 열망이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 정말 애를 쓰고 있다면, 정말 애를 썼다면, 그 기억이 눈물은 아닐 것 같다는, 딱 꼰대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2030 세대일 때의 유행가나 영화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걸 누릴 새 없이 그저 살아야 했다. 이런 영화에 위로 받고 울 수 있다는 건 이미 많이 가진 입장임을 젊은 세대가 알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다시 불안에 대하여.

젊은 시절, 빠리 도피 시절에 만났던 미학과 지인이 떠올랐다.

어느 날 대화 끝에 당시 내가 어려워하고 있던 우울감에 대해 말하자 그가 이런 답변을 했었다.

우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어디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의 말에 나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불안이든 우울이든 뭐로든 규명된다면 그건 시달리기보단 누리는 쪽이다. 우리를 정말 짖누르는 감정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는 그 모든 마음의 총체가 나이기 때문에 오늘도 집중적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나를 향해 걷고 또 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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