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어 수업

나를 살리고 내가 살린 2,840개의 이름

by 글섬

낡은 주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흥미를 유발하기엔 충분했지만, 유대인 강제 수용소는 이미 너무 많이 노출된 얼굴이라 역시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2시간의 낯익은 장면들을 통과해 마침내 도착한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2,840개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마지막 3분여 정도의 짧은 엔딩은 앞서 두서없이 배열되었던 감정들을 완벽하게 압축해 막강한 감동으로 완성한다. 영화에 있어 어디에 방점을 찍을지는 전적으로 감독의 선택이라는 새삼스런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결정적 한 방이다.


사실 이 영화는 미장센 장인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한 땀 한 땀 짜깁기 된 듯 완벽한 미장센의 연속인데, 주제가 무거운 경우 바로 그 미장센으로 인해 무게감이 더해진다.



구도는 물론이고,



색감에서



조도,



여백까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완벽하게 프레임 하나씩 그 자체로 완성이다. 그리하여 관객의 심기는 뭔지 모르게 더욱더 불편하다. 하지만 굳이 대사가 없어도 될 만큼 뻔한 장면들의 연속인데도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일등 공신도 바로 미장센이다.


자아 실현이 어쩌구, 자기 정체성, 재산 증식, 명예나 인정욕, 가족 공동체의 번영 어쩌구 저쩌구, 갖가지 이유로, 아니면 대체로는 별 이유 없이 오늘과 내일만 갈급한 현대인으로서는 지난 세기의 낡고 낡은 범인류적 범죄로 생의 의미를 짚어 보기엔 너무 배부르고 너무 노곤하다.


그러나 두려움.

두려움은 다르지 않다. 20세기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구석기 시대까지 소급해도 두려움은 그 어떤 생의 의미보다 원초적인 본능이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 군용 트럭에 실려가던 주인공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허기진 청년의 제안으로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와 청년이 우연히 얻게 된 페르시아어 도서 한 권을 마지못해 맞바꾼다. 마침내 허허벌판 앞에 트럭이 멈추고, 독일군들은 포로들을 2열로 나눠 전진시킨다. 앞서 걷던 제1열의 포로들이 일렬로 채 줄을 서기도 전에 사격이 시작된다. 2열에 서 있던 주인공은 공포에 질려 총을 맞기도 전에 쓰러지고, 이를 놓치지 않은 독일군 병장이 그를 난폭하게 일으켜 세웠을 때 그를 주도했던 건 죽음에 대한 공포뿐이었다. 그는 가슴팍에 꽂아뒀던 페르시아 도서를 꺼내 손을 떨며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이라고 겨우 말한다.


때마침 병장의 소속 대대의 대위 하나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포로들 중에서 페르시아인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소고기 통조림 10통을 포상으로 내걸었다. 병장은 사실 주인공이 영락없는 유대인이라고 확신했지만 전장에서 먹거리는 진실보다 더 진실하다.


그렇게 시작된 페르시아어 수업은 갖은 의심과 계략과 추적을 뚫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막상 통조림 10통을 얻고 나자 병장은 후방 포로 수용소의 맹목성에 일조하는 수단으로써 주인공이 유대인임을 증명해 총살하고야 말겠다는 결의에 집착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하나의 언어를 구성하는 그 수많은 어휘 싸움을 어떻게 완전한 무(無)에서 시작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문명을 새로 일으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본다, 나는.


하지만 다시 한 번 두려움.

유대인임이 들통나는 순간, 즉사할 거라는 확신의 공포가 기적의 학습법을 불러낸다. 때마침 수용소에 새로 입소하는 포로들의 목록을 작성하던 여군이 악필로 대위의 분노를 사고, 공교롭게도 주인공은 명필에 가까웠기에 포로 명단 기록 작성자로 지목된다. 2,840개의 이름을 기록하던 주인공의 순발력이 각 이름의 일부에서 페르시아어 단어를 하나씩 추출한다.


하지만 인간은 고갈의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리 절절한 간절함일지라도 한없이 퍼올릴 수 없다. 언어 창제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영혼이 고갈된 주인공이 자발적으로 몰살 예정의 포로 무리에 끼어 행군하다가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대위가 그를 무리에서 빼낸 뒤 왜 그랬냐고 묻는다.


- 지긋지긋해서요.

- 뭐가?

- 두려워하는 거.


사는 건 힘들다. 어떤 삶도 그렇다. 그럼 왜 사는가. 존재는 필멸의 두려움을 숙명으로 하기 때문이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떠안지 않은 생명체는 없다. 생각하는 힘을 가진 인간은 굳이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고갈로 인해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지만 이를 최종 저지하는 힘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소멸에 대한 본능적 공포이다. 수틀리면 맥락 없이 불을 뿜는 독일군의 총구 앞에서 한없이 불안한 존재의 두려움을 지켜 보고 있자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종거리며 하루하루 밀고 가는 우리의 사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른다.


때문에 농밀한 두려움을 짊어지고 생을 향해 내달리는 길 위에서 그의 표정은,


한없이 나약하고 무력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다.

하루하루 가다가 좀 더 지치는 날에는 이 장면이 떠오를 것 같다.

어떤 길인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길 위에 있으므로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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