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지음 / 박소현 옮김
소설이 아니라 대하드라마를 몰아 보고 있는 듯하다. 1917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1964년 박정희 정권까지 한국의 근대사를 연대별로 오롯이 따라가며 시대상과 인물들을 조각해내는 솜씨가 가히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방불케 한다. 문장은 유려하고 인물과 사건 들은 입체적이다. 평양에서 제주에 이르기까지 모국의 근대 도시와 산촌 들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솜씨가 모국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방대한 대하소설의 작가 김주혜는 재미교포 2세로, 애초에 영어로 집필한 작품이다. 때문에 잠시 책을 덮고 돌아선 순간에도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 있는 이야기 전개와 인물들의 개성 표현에는 작가뿐만 아니라 옮긴이 박소현의 각별한 애정과 노력도 다분하리라 짐작된다.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한국 근대사는 국내 독자들에겐 이미 다소 식상해진 소재이기에 모든 면에서 클리셰의 연속 같은 기시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개글들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역동의 근대사가 컨덴츠로서 매우 매력적이라는 방증이고, 그런 점에서 소재에 대한 이 피로감은 안타까운 일이다.
읽는 동안은 방대한 역사 흐름 속 인물과 사건 들의 흥망성쇠를 따라가는 재미가 무척 쏠쏠해 즐겁지만, 그게 전부다. 더는 생각이 연장되지 않는다. 굳이 글이 아니라 영상이더라도 무방할 만한 스토리 중심이 아쉽다. 웹툰이나 영화, 드라마와 달리 문학이라면 중심축이어야 할 질문이 없다. 요컨대 작가가 글을 끌고 갔다기보단 한국사에 매몰된 느낌이 든다. 실제로 할아버지가 독립군이었다는 작가로선 한국 근대사가 몹시 매력적인 소재이자 일종의 과제 같았겠지만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우리는 이미 큰 틀의 흐름보다 개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질문이 한층 더 번다하고 복합적인 시대에 도달해 있고, 문학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단지 스토리가 아니라 빛나는 문장 속에 감춰진 질문과 방향성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초조한 행복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 평소의 나는 초조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는데, 그건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간절히 원하는 게 생기고 보니, 갑자기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굉장히 중요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249페이지)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250페이지)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종종 그들 대부분이 사실 돈 아닌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곤 해요. 그들은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게 자신의 최종 목표라고 말하는데, 그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인정하는 것보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290페이지)
연화는 거침없이, 결의에 차서 울었다. 다시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야 하는 사람처럼 울었다. (536페이지)
자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갖게 만드는 건 세상에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인에게 닥친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는 것이죠. (56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