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문학동네
리뷰 같은 건 쓰고 싶지 않다. 쓸 수가 없다.
덧붙여 말할 아무것도 없기에.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났다. 마지막 장을 덮고 잠시 아프게 울었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토록 제대로 방향을 잡아 미칠 수 있는 그가.
추상화 같은 글이다. 붓칠 한 번마다 정밀한 압력과 밀도로 차곡차곡 색을 쌓아 밀어 올려진.
그리고 음악 같다. 보이지 않는 운율이 문장과 문장을 이어 흐르며 좀처럼 멈추기 어려워 자꾸만 맴을 도는.
어떤 작가든 한두 권쯤은 잘 쓸 수 있다. 심지어 모든 책을 잘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책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기는 어렵다. 아주 많이 어려운 일이다. 한강 작가의 모든 책은 소외된 살아있음에 대한 고통과 사랑으로 점철된다. 그의 모든 글이 하나의 과녁을 관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후무한 작가다.
노벨문학상 수상 자격에 대해 왈가왈부 시시비비를 따지며 거들먹대는 논객들이(심지어 작가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같은 의견이라면 부디 절필하기를 간곡히 청하고 싶다.
붓칠 한 번에 해당할 문단을 떼어 옮겨 놓는다고 해서 그림 전체를 가늠할 턱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다만 기록을 위해,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고 한참을 먹먹해진 기억을 위해 굳이 떼어내본다.
압도적인 성량으로 끊임없이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던 여름이 갔다. 더이상 매 순간 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온몸에 힘을 빼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수없이 찬물 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입고, 증기 같은 열풍이 더이상 불어오지 않는 도로변을 걸어 나는 식당에 간다. 여전히 요리를 할 수 없다. 한끼 이상의 식사를 할 수도 없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었던 기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칙들이 돌아온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지만, 다시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체크하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한다.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P.29)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인선은 이십대 후반부터 다큐멘터리영화에 관심을 가졌고,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일을 십 년 동안 끈기있게 했다. 물론 벌이가 되는 촬영 일도 닥치는 대로 했지만, 수입이 생기는 대로 자신의 작업에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에 늘 가난했다. 그녀는 조금 먹고 적게 쓰고 많이 일했다. 어디든 간소한 도시락을 준비해 다녔고,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고, 거울을 보며 숱 가위로 직접 머리를 잘랐다. 단벌 솜 파카와 코트는 안에 카디건을 덧대 꿰매어서 따뜻하게 만들었다. 신기한 점은 그런 일들이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하는 듯 자연스럽고 멋스러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P.33)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P.317)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P.318)
무엇이 지금 우릴 보고 있나, 나는 생각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는 누가 있나.
아니, 침묵하는 나무들뿐이다.
이 기슭에 우리를 밀봉하려는 눈뿐이다.
(P.320)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인선이 있는 쪽의 어둠을 향해 나는 말했다. 상체를 일으켜 주머니 속 성냥갑을 꺼냈다. 거칠거칠한 마찰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거기 성냥개비를 부딪치자 불티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황 타는 냄새가 번져왔다. 촛농에 잠긴 심지를 꺼내 불꽃을 옮겼지만 곧 꺼졌다. 엄지손톱까지 타들어온 성냥개비를 흔들어 끄자 다시 어둠이 모든 걸 지웠다. 인선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더미 너머에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P.325)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