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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스 콰르텟

브람스 현악 4중주 1번 2번 3번

by 글섬


노부스 콰르텟을 만나러 갔다가 브람스를 만나다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바람이 분다, 가라> 248페이지, 한강





거기에 고스란히 있었다.

찬란해서 아프고 아파서 아름다운 달의 뒷면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고통스러운 우리의 생이 브람스 현악 4중주 1번에 고스란히 새겨져 넘쳐 흘렀다.

외로움도 슬픔도 고단함도 고통도 고이고 고여 우물 안 깊은 곳에 잠겨 뚜껑을 닫아버린 나이에 찬란해서 깨어지고 부서지며 아파서 아름다운, 생의 그 반짝이는 파편들이 눈이 부셔 눈물이 났다. 하염없이 아름다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브람스를 잘못 봤다. 그에게도 있었다. 달의 뒷면이.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혀. 그의 완벽한 화려함은 소박한 내겐 외향에만 치우쳐 무게중심을 잃은 듯해 불편했다. 그가 자아내는 고급스런 아름다움은 지나치게 정제되어 작위적이었다. 오늘 현악 4중주 1번과 2번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클라라라도 백 번, 천 번 슈만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렇게 아팠다. 이만큼 부서지고 깨어졌다. 그 과정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너무 찬란해서 부서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아프게 토해내고 있었다. 어쩌란 말인가, 이토록 찬란해서 아프고, 아프도록 아름다운 생을 어쩌란 말인가, 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청춘이었다.

1번은 청춘의 찬란함과 위태함, 그 버거운 눈부심이었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상처가 봉합되지 않고 생채기가 쓸리는 그 순간, 바로 그래서 조우하는 아름다움이라니.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음악이라는 무형의 매개체로 전달해내는 인간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이어진 2번에서 브람스는 강해졌다. 앞서 오열하던 고통과 아름다움을 감당해낼 준비된 자의 담대함이 묻어났다. 두 발 팽팽히 바닥을 디디고 생의 그 어떤 농담도 대적할 각오를 마친, 혹은 이미 대적하고 있는 자의 고단한 묵묵함이 거기 있었다. 여기저기 이미 패이고 깎여 낡고 파손된 폐허의 아름다움이 네 개의 악장 내내 담대하게 펼쳐졌다. 미생들의 완생이었다.


그러나 3번은 다시 예의 그 브람스.

온갖 종류의 미사여구로 꾸며진 답사 같았다.

진실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고 말하는 듯한.


그래, 사는 건 저런 거지.

브람스 현악 4중주 1, 2, 3번은 생에 관한 연강 같았다. 너무 많아서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내가 대중음악계를 떠났던 건 그들의 업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그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일 년 내내 덜 먹거나 더 일하거나 뭐가 됐든 그날을 위해 공들여 싸우고 그날 그 객석에 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예술을 팔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모든 누군가의 경우의 수를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책임져야 마땅하다.


내게 노부스 콰르텟은 필생의 꿈이었다. 비행기 1등석처럼 아득했던 꿈을 만나는 날을 위해 나는 지난 20년 동안 매일 클래식을 들었고 지난 1년 동안 울며불며 벌었다.


자자한 그들의 명성은 사실이었다. 2번까지는 분명 그랬다. 브람스의 이야기를 내게 직진으로 건네어 메말랐던 나의 가슴을 충분히 적시었으니.


노부스 콰르텟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고 했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3번으로 돌아온 그들은 타인과 조율해내는 20여 년의 시간이 얼마나 무리인지 서술했다. 그들을 갈갈이 찢어 단독 무대를 세우고 싶을 만큼 균열은 여실했다. 그건 무대를 마치고 단원 중 누군가는 민망하게 웃고 누군가는 분노한 얼굴을 하는, 그런 단면이 아니다. 무리라면 그만 닥쳐야 한다. 그들의 무리를 관객에게 감당하게 하기까지 닥치지 못했음에 대한, 그 비겁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마땅히 그러했어야 한다.


행복했다. 피로로 더께 진 토요일, 왕복 4시간의 고단함을 물리칠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그건 브람스 덕분이지 노부스 콰르텟의 노고는 아니었다.


공연 이틀 전 클래식 에프엠 실연 방송에서 이미 그들의 연주를 들었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살인적 스케줄의 피로감을 토로했다. 브람스 현악 4중주 3번이 끝난 직후엔 나 역시 피로로 곤죽이 되었기에 그들의 어긋난 막판 집중력을 넉넉히 양해할 수도 있을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피로하지 않은 업이 있던가. 일개 개인을 상대하는 업도 개인의 피로가 핑계가 될 수 없다. 하물며 20년의 결과물이고 수백 명을 상대로 한 이야기라면 치명적일 수 있다. 모쪼록 치명적으로 부끄러워했길 바란다.



프로그램북 사진에 박제된 그들을 만나고 왔다.

사진을 찢고 나오는 그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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