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쾌락, 필생의 책임
누가 하룻밤 쾌락에 여생을 걸 수 있을까.
부모가 위대한 건 바로 이걸 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순간이든 영원이든, 진심이든 향락이든, 자신이 누렸던 시간에 대해 무한히 책임지는 존재로서 갈채 받는 자가 바로 부모다. 뭐가 되었든 책임은 인간으로서 궁극적인 존재가치니까.
영원히 떠나기 전 잠시 머무는 아빠와
잠시 머물며 영원을 채집하는 딸아이의 이야기이다.
뜨거웠던 태양 그 이후.
개인적으론 또 다른 두 영화가 중첩되어 흘렀다.
이 영화의 프리퀄 같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후속작 같은 <케빈에 대하여>.
두 작품 모두 젊은 피가 누린 짧았던 쾌락에 대한 불멸의 책임을 모태로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아이의 시선이다.
사랑이 뭔지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가 이제 영원히 사라질 아빠에 대한 사랑을 견뎌내는 모습을 그린다.
사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단 스스로를 책임질 힘을 갖지 못한 존재가 느끼는 불안감일 뿐이지만 그걸 깨닫기까지 아이는 무한한 무중력의 정신 상태를 거쳐야 할 운명이다. 채워진 것도, 그렇다고 비워진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의 장력으로 밀쳐지거나 당겨지는 영겁의 불안은 부모 사랑의 부재로 발생하는 최악의 결과물이다. 흔히 말하는 자존감의 부재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부모로부터 느낀 불안감으로 세상을 동동 떠다니는 부유감에 비한다면.
마지막날 아침에 나신의 등으로 오열하는 아빠의 모습이 압권이다. 그 이전과 이후로 모든 영화의 시선은 불안정 자체였다. 카메라는 앵글이 기울거나 흔들리거나 작정하고 반쯤 가려지거나 대사와 무관한 피사체를 무람히 비추는 형태로 동동 떠다닌다. 하지만 한밤 파도에 몸을 내던지고 다 큰 딸아이 침대에 나체로 누워 잠이 들 만큼 그야말로 환장하게 젊은 아빠가 떠나는 날 아침에야 '진심으로 사랑해'라는 카드를 써 놓고 오열하는 그 장면만은 단단하다. 그것만은 진짜거나 불변이다. 그런데 그게 그토록 초라하다니. 이를 위해 감독은 기어이 나신의 등을 원했던 듯하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굳건해지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드니 모든 게 상상초월 유동적이라 어지럽다.
진짜라거나 진심이라거나 영원 같은 건 오히려 가볍다.
정말 단단한 건 흐르는 것.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들이야말로 지금을 살며 내일을 책임지는 것들이다.
아빠는 아이가 공항 개찰구를 빠져 나가자 그동안 숙제처럼 들고 다녔던 비디오 카메라 화면을 닫고 가뿐한 걸음으로 공항을 빠져 나간다. 그가 나간 여운으로 흔들리는 문이 아프다. 비행기 좌석에 홀로 앉아 눈물을 닦고 있을 아이가 여울져서다. 하지만…
책임은 스스로가 우선이다. 아이가 부디 그걸 깨닫는 날이 오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그게 하룻밤 쾌락이든 불멸의 사랑이든 그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책임이 아니라면 그저 또 다른 지옥을 양산할 뿐이라고 위로해주고 싶다.
젊은 아빠도 어린 아이도 그 후로 오랫동안 외롭고 아팠을 테지만 어차피 그러자고 사는 거다. 그러니 이왕이면 더 많이 외롭고 더 많이 아파해서 그 힘으로 살아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