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탐미적 자기 혐오
그리고 현란한 시각적 요소들로 중첩되는 질문,
자존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눈은 진실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보는 우리 자신은 실은 우리가 아니다. 거울이 반영한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은 인플루언서로 극단화되었다. 외모가 전부인 그런 생이라면 슬프게도 자존은 쉬이 외형으로 집약된다. 제아무리 출중한 외모라도 노력의 노력을 거듭해도 거듭날 수 없는 나이는 도래하기 마련이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나라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지만,
젊을 땐 나도 몰랐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대체로 흡족했다. 그런데 나의 외형이 나의 기준과 어긋나기 시작하는 오십이 되자 비로소 자존감이란 게 무엇인지 소명해야 하는 순간이 매일 새로이 도래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살면서 나만큼 치열한 혈투를 벌이는 상대는 없다. 언제나 내가 제일 설득하기 어렵고 내가 제일 골칫거리다. 내가 나인데도 나는 늘 내멋대로여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가 숱하다. 남은 제멋대로 살아도 내 몫이 아니지만 내가 내멋대로 굴면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문득 돌아보면 나를 쥐어박고 있는 수많은 순간들, 숱하게 찌르고 밟힌 나의 주검들 위로 자존감이 깃발처럼 꽂히는 생의 아이러니가 애달프다.
쭈글쭈글 늙은 나와 팽팽히 젊은 내가 서로를 향한 자기 혐오의 극단에서 데미 무어의 때아닌 요리 장면이 압권이다. 생닭의 내장을 파내고 돼지고기 살을 우겨넣은 소시지를 지지고 볶고 튀겨내는 그 탐미적 혐오의 시각적 언어에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저 내가 나일 뿐인데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만 싶은 나라니.
백 년 가까이 자기 자신으로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자존감을 지킨다는 건 어떤 것일까.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언제야, 라는 질문을 받으면 답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차피 되돌아가지 못할 텐데 뭣하러 수고로이 그런 걸 고민해? 흉측하게 늙어버린 데미 무어를 바라보면서야 깨달았다. 그건 어떤 나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골몰히 선택해보면 안다. 나란 인간이 어떤 나를 원하는 사람인지를.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의 내 모습이 내가 가장 원하는 내 모습이다. 자존감의 출발점이다.
아주 많이 다투고 죽도록 미워하는 내가 있다는 건 내가 원하는 내가 있다는 뜻이다. 나와의 혈투는 필패 같지만 전장마다 얼룩진 피비린내를 뚫고 자존의 꽃이 피고 진다.
아슬아슬하다.
나로서 산다는 건, 나로써 산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