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즈 사강 지음 / 김남주 옮김
역자인 김남주는 작품 해설에서,
프랑스인들은 대개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프랑스에서 브람스의 연주회에 상대를 초대할 때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필수라는 말이 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작품 제목에서 '브람스'는 무엇을 뜻할까.
작품 속 폴과 시몽의 관계가, 열네 살 연상인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외사랑으로 읽히기도 한다지만,
인물들은 사랑 밖에 존재한다. 과장된 열정, 왜곡된 진실, 그를 통해 다다르는 가없는 권태. 그리고 다시 그 권태가 끌어내는 과장된 열정, 왜곡되는 진실, 가없는 권태… 관계는 이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겉돈다. 사랑이라고 포장된 열정, 열정이라고 치부된 권태, 그로 인한 본능적인 집착이 인물들을 저마다의 지옥으로 데려가는 내내 선택은 유보된다. 상대를 원함과 동시에 원하지 않는 감정의 과잉은 역설적으로 자아를 소멸시킨다.
작가가 말하는 브람스는 결말에 포진되어 있다.
로제를 기다리다 지친 폴은 로제의 품을 대신해 시몽의 열정에 잠시 허물어지지만 어렵사리 로제에게 돌아간다. 그러자 로제는 다시 예전처럼 그녀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기다리게 한다.
얼핏 보기엔 사랑에 대한 비아냥 같은 결말이다. 하지만 폴이야말로 사랑을 선택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지금 폴이 모호하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로제에 대한 사랑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기 위해 지금 당장은 그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사랑이 다했다는 확신이 오면, 로제의 품에서 시몽의 품으로 옮겨가는 선택 대신 그 자신이 오롯이 걸어가는 길을 선택할 그녀다. 이미 그 모든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안정감을 제공했던 남편과도 지지부진한 관계를 정리해본 적 있는 폴이기에.
개인적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장된 열정과 아름다움 사이로 진실은 아스라한 듯 느껴져서. 하지만 그가 현실에서 보여준 사랑에 대한 책임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비현실적인 그의 음악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여기서 브람스는 바로 이런 맥락의 대명사로 쓰였던 게 아닐까.
사강은 필력보다 화려하고 방만한 사생활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또렷하다. 쾌락의 정점에 닿았을 법한 작가가 그려내는 권태는 차라리 처연하다. 그리고 그 권태를 뚫고 기어이 도달하는 관계에 대한 선택과 책임은 가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