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진 장편소설
독서 인생 몇 해인데 새삼스레 글의 힘을, 특히 소설의 힘을 절감하게 해준다.
태국의 대리모 이야기는 언젠가 티비 다큐로 처음 접한 적 있다. 대리모를 희망하는 태국 여자들이 대리모 에이전시에게 면접을 보던 장면이었는데 대리모를 자원할 만큼 절절한 개인사 등이 자막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어떤 사연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글의 힘은 개연성보다는 확장성에서 얻어진다. 단순히 대리모 이야기였다면 책을 덮으면 그대로 끝이었을 세계가 인물들의 관계를 거미줄처럼 타고 넘으며 사고를 넓힌다.
주인공 인우에게는 그녀만을 바라봐주던 남편 지석이 있었지만, 남편과의 더할 나위 없는 일체감은 오히려 아이에 대한 열망을 부추긴다. 남편은 숱하게 대리모를 거부하며 점점 멀어져 가지만 인우는 아이만 얻게 되면 모든 불화는 단박에 불식되리라 굳게 믿는다. 그 턱없는 믿음이 당기는 시위의 반동은 어떤 변수에도 멈추지 않는다. 생각에 갇힌 그녀는 생각에 집착한다. 남의 몸을 빌어서까지 집착적으로 아이를 원했던 인우는 모든 게 파괴된 후에야 난자마저 타인에게서 구입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여기서, 가족의 형태랄지, 대리모의 인권이랄지, 부의 편중이 유발하는 권리 남용이랄지, 그런 다양한 시선 끝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 봉착한다.
아이는 가장 건설적인 자기 투영물이다. 아이가 비춰주는 나의 오늘과 내일은 그 어떤 선택보다 안온하고 희망적이다. 그건 이 험한 세상에 완전한 불완전의 형태로 뚝 떨어진 존재를 상대로 벌이는 사랑의 극기 체험으로 진화해야 마땅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랑의 집중 포화 상태에 머문다. 보행조차 혼자는 불가능한 최약체로 세상에 오는 아이가 자신의 창조주에게 바치는 가혹한 절대 복종은 완전한 사랑 그 자체이다. 인류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궁극의 지향점이다.
그러니까 사랑
이라기보단 중독
사람은 집중해야 할 무엇으로 산다.
인우가 사랑을 갈망했다고 하기엔 이미 지석의 사랑이 있었다. 그런데도 인우가 원했던 건 아이라는 새로운 집중이었다. 이미 가져서 더 가지려는 욕망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자라나 삶 전체를 통째로 삼킨다. 인우도 처음부터 대리모를 원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에이전시 말에 살짝 귀를 열었을 뿐이다. 조그마한 미혹의 틈이 어느 순간 벌컥 열리면 이미 나는 믿었던 내가 아니다.
중독될 무언가에 대한 미혹.
어쩌면 삶의 이유가 될 그 미혹들 앞에서,
무엇으로 살 것인가,
그 기준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선을 그어둬야 할 것은 미혹의 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