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김남주 옮김 / 아르테 출판사
원제 Bonjour Tristesse에 주목한다. Bonjour는 만났을 때 건네는 인사다. 국어의 아름다움을 위한 번역인 듯하지만 프랑스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에겐 '잘 가거라, 슬픔이여'라고 인식되기 십상이다. '어서 와, 슬픔아' 정도가 맞는 번역이다. 주인공의 나이가 열일곱 살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역자 김남주가 분명 프랑스어든 국어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일 테니 넘어가자.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11페이지)
이 글을 읽기까지 무려 3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게 놀랍다. 너무 유명한 글이라 늘 읽기 목록에 있었건만.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책이 있고, 읽기는 그토록 늘 밀린 일기 같다.
책을 덮었을 때 슬픔보다 두려움을 느꼈다. 작가로 산다는 건 발가벗겨지는 일 같아서.
사강이 스스로 이 소설에 대한 에세이에서 밝힌 바와 같이 소설의 모든 것은 허구이다. 하지만 사강의 글은 언제나 구성보다 인물이, 인물보다 저자가 앞서 있다. 작가와 무관한 장소와 인물들의 구성이라는데도 글은 사강일 뿐이다.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데다 충동적이다. 사강 그 자체다.
사강은 이 글을 열여덟 살에 발표했고 일명 '사강 신드롬'을 일으켰다. 출중한 필력에 충분히 어린 나이만으로도 스타가 되기에 충분한데 심지어 아름다웠다. 사강은 지력이 밀어올린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었다. 다독을 통해 문학으로 쌓아 올려진 그녀의 아름다움은 작가, 비평가, 기자, 배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심미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매혹될 만한 것이었다. 애초에 글로써 주목 받았던 그녀지만 이후 거침없는 사생활로 저평가된 작가이기도 하다.
어쨌든 왜 나 자신을 그렇게 비판해야 하지? 나는 그냥 나야. 그러니 사태를 내 마음대로 느낄 자유가 있는 게 아닐까? 평생 처음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듯했다. 나는 이런 이중적인 면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다. 나는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찾아내 나 자신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런 내가 진실한 나라고 설득했다. 다음 순간 갑자기 다른 '나'가 솟아올랐다. 그 다른 '나'는 조금 전 나 자신의 논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겉으로는 모두 타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착각이라고 외쳐댔다. 그런데 사실 나를 속인 것은 이 다른 나가 아닐까? 그런 통찰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잘못이 아닐까? 나는 몇 시간이고 방에 틀어박힌 채 안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적대감과 공포가 타당한지, 아니면 내가 입으로만 독립성을 주장하는, 버릇없고 이기적인 여자애일 뿐인지 알아내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86페이지)
앞서 읽었던 사강의 다른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그렇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인물의 내면이나 환경 대신 저자가 궁금해진다. 그게 사강의 한계 같다. 사강의 글은, 너무 많아서 어느 쪽으로 줄기를 잡아도 반대편이 잘 보이지 않는 사강 본인의 복사판이다. 사강은 독자가 소설을 읽고 왜 자꾸 저자의 생과 혼돈하는지 모르겠다고 항변했지만 저자가 소설의 세계를 완전하게 구축하지 못한 미숙한 설정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인물들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인물들은 매우 유사하다. 자기 자신과 쾌락의 격렬함에 탐닉하는 자들. 바로 사강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은 조립이 잘된 레고 같다. 끝없이 내면의 이면을 드러내며 방탕하는 인물들과는 대조적으로 글 자체는 빈틈이 없고 심미적이며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다만, 너무 치열하게 도발적이다. 때문에 글이 인물을 포괄하지 못한다. 사강의 세련된 문체를 인물이 먹어치운다. 사강의 인물들은 인간 내면이 얼마나 좁고 하찮은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그래서 얼마나 권태로운 존재인지를 반복적으로 시사한다. 헤르만 헤세의 인물들이 숱한 방황 속에서도 기어이 도달하는 진리 같은 건 없다. 글 대신 인물이 전체를 장악하고, 그로 인해 저자가 부각된다. 아마도 인물의 내면에 치중한 대가 같다.
사강은 끝없이 스캔들에 시달렸다. 그녀는 몰랐던 것 같다. 그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를. 예술의 창작은 특별한 자들의 영역이지만 지나친 특별함은 오히려 불편함으로 치부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그녀의 글은 그녀를 초월하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튀어오르기만 한다.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 요컨대 사강은 과도하게 사강 자신이었다. 사강의 글에는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내면들로 가득하다. 바로 그 때문에 대중적으로 성공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대중적인 주목과 지탄을 동시에 받았다. 천재적 필력도 성숙한 내면 없이는 파국뿐임을 그녀의 모든 글이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