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펜 감독 / 에밀 허쉬 주연
애초에 이 영화에 바란 게 이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최근에 읽었던 <편안함의 습격> 실사판쯤이었다. '길 위의 인생'을 원했다면 <노매드랜드>가 시작이자 끝이니 더는 필요치 않고, '와일드'를 원했다면 다큐가 나을 텐데. 단적으로 포스터에 속았다.
알래스카 한 귀퉁이에 버려진 버스도 비현실적인데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스물셋 청년이라니. 비현실적으로 가혹한 결말에 엔딩 크래딧 내내 입이 떡 벌어졌다.
사실 스물셋은 세 살 혹은 열세 살보다 훨씬 더 취약한 나이다. 감히 스스로 강하다고 착각하는 나이. 충분히 어리지도 않고 충분히 어리기도 해서 세상은 더 이상 봐주지 않는데 저 혼자 온 세상을 감당한다고 믿는 돈키호테 같은 나이. 잡초처럼 자라난 자아로 세상이 가려져 귀도 눈도 없다. 오로지 저 자신만 존재하는 유일한 시절인데 오직 자신만 존재한다는 건 그토록 섬뜩한 일이다.
원래도 그러한 나이의 저변에 아동 학대가 깔리게 되면 총구는 반드시 그 자신을 향한다. 반드시 그렇다. 가진 거라곤 그 자신뿐인 데다 학대의 주체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테러가 될 테니 다른 대안은 없다. 올 A 학점으로 대학을 졸업해 하버드 법대 입학 가능성을 장담할 때조차도 그는 부모에 대한 응징 외엔 자기 생의 쓰임새를 알지 못한다. 도시와 자본을 경멸하고 알래스카를 염원하며 전 재산을 기부하는 것도 모자라 가지고 있던 지폐를 모두 불사를 때 그가 정말 태우고 싶었던 게 그 자신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대학에서 도대체 뭘 배웠던 걸까, 싶지만 자기 자신과의 조우는 그토록 요원하다.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난 여동생은 오빠의 상처를 이해했다. 하지만 의문한다. 2년 가까이 맨 몸으로 떠도는 동안 오빠는 왜 한 번도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같은 상처를 나눈 처지인데. 부모 몰래 얼마든지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상처는 깊을수록 나눌 수 없다. 게다가 어떤 조건의 환경도 모두에게 동일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애초부터 이 다름이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가 적은 문장이다. 그렇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순간의 진실이다. 오직 혼자 떠돌기 위해 길을 나섰고, 길 위에서 혼자일 때 완전히 행복했던 그였다. 원인이 아동 학대였든 신념이었든 그가 혐오했던 모든 것들-인간, 도시, 문명, 자본, 부모, 직업, 미래-을 등지고 오직 그 자신만의 길을 확신했고 그로 인해 완전했다. 다만 욕심이 지나쳤다. 원했던 게 뭐였든 완전무결하게 가질 수는 없다. 원하는 게 뭐든 조금은 내어주고 내어준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 나 홀로 원했던 모든 걸 누린 다음에야 나누는 행복을 깨달았을 뿐이기에 절반의 진실이다.
세상만사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요컨대 타이밍의 문제다. 때문에 뭐로든 항시 스스로를 벼려 촉을 세워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건 모두 결과론적이다. 우리는 흘러가는 존재이고 오늘의 나는 딱 오늘만큼의 존재이기에 그가 선택한 그만의 생을 지지한다. 너무 짧아서 아쉽기는 해도 누가 그만큼 열렬히 꿈을 꾸고 치열하게 실현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남들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정작 자기 자신은 흘깃 흘려 보기만 하는 우리로서는 그를 판단할 잣대 자체가 없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온다.
다시 포스터를 본다. 역시 감독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