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머스 앤더슨 각본 및 감독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주연
관객이 영화에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그 모든 걸 완비한 영화다.
서사, 시사, 액션, 판타지, 감동, 스릴, 호연, 미장센까지.
요컨대 대중성과 예술성을 7:3으로 겸비한 갓벽한 영화. 이게 되네, 싶은.
미국의 현 주소를 향해 가감없이 직진하면서도 컷마다 딱 한 방울의 코미디로 무게를 희석함으로써 제삼자인 관객을 주제의식에 바짝 다가서게 한다. 가깝게는 바로 지금 날마다 인종 전쟁 중인 미국을, 멀게는 이념에 절어가는 전 세계 인간 군상을 조명한다. 집단의 이념과 존속, 혹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바퀴벌레보다 못한 개인의 목숨을 너무도 날렵하게 처리한 감독의 예리한 칼날 덕분에 관객의 시선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꺼이 확장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미친 연기에 쥐락펴락 휘둘려지며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생각한다. 커다란 전체가 쪼개지며 형성되는 '우리'일 뿐인데 '우리'가 전체가 되어버리는 편집증에 대해 생각한다. 연인, 친구, 가족과 같은 아주 작은 '우리'조차 또 다른 '우리'를 상대로 한 배타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 본능에 가까운 편가름. 그로 인해 날마다 전장에 서야 하는 오류 속에서도 매일 새로이 '우리'라는 전열을 정비하는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해 개탄해봐도 사실상 이렇다 할 해법이 없다.
어쩌면 우린 끝내 싸우도록 직조된 존재일까. 그렇다면 싸워서 지켜야 하는 게 있다는 건데 그것은 무엇일까. 세대를 이어가면서까지 기어이 지켜내야 할 그 불멸의 가치는 무엇인 걸까.
가족을 포기하면서까지 사수하는 여주인공의 혁명 활동이 과연 그녀가 확신하는 대로 '혁명'인가, 의문한다. 혁명을 위해 어린 딸을 저버린 뒤 자유를 위협 당하자 이내 저버리는 그것이 대의일까. 아마도 그건 그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육아 따위에 매여 살기 싫었던 본심을 가리기에 더없는 가림막으로써 대의가 소비되었고, 극렬 혁명 전사로서의 그녀는 실상 끓어오르는 열정을 감당하지 못한 열정 과다 족속이 아니었을까. 당장 자기 앞에 떨어진 가장 작은 단위의 책임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대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지 믿을 수가 없다.
극좌 혁명 단체이든 크리스마스 모험가 단체이든, 어느 쪽에서 어느 방향을 추구하든 살인은 다만 살인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만큼 어불성설이 또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바로 이념이 발생하고, 갈린다.
결국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인 한은 달라질 게 없다. 결국 개인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존재하게 되는 인간이라면 매일 전장에 서야 할 운명인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싸워서 지켜내야 하는 게 있다는 건데 그것은 무엇일까.
과감하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바를 믿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믿는 바를 지켜내야 한다고 믿을 뿐이고, 우리가 믿는 바를 지켜내기 위해 다른 우리가 존재하면 안 된다고 믿을 뿐이고,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믿음을 지켜내려 버둥댈 뿐이다. 결국 내가 나를 속인 우리가 우리를 속여 만들어낸 믿음을 위해 나와 우리를 소비하고 있다.
그러자 내가 나를 잘못 다스린 탓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할 게 있다면 바로 다스림이다. 치우침으로 추악해질 나 자신을 경계하고 다스리는 힘이야말로 매일 닥치는 전장에서 사력을 다해 지켜내고 세대를 이어 전수해야 할 가치라고 믿는다. 물론 이 믿음 역시 나만의 믿음이기에 또 다른 믿음과 충돌해야 함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영화의 엔딩으로 애지중지 키운 딸아이가 엄마의 뒤를 이어 다시 전장에 오른다.
참으로 인정사정없는 감독이 질문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