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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an 17. 2023

초강력 다정


     다정은 힘이 세다. 어떤 다정은 그 주체였던 사람 자체나 그와의 관계보다 더 강력하게 각인되어 오랫동안 살아 숨 쉰다.


     짧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공연 연습실로 복귀했을 때 키보드 연주자였던 그는 코러스 자리까지 상당한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다가와 마이크 앞에 서 있던 나를 망설임 없이 품에 안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그의 확신에 찬 포옹에 나조차 어리둥절해지는 과감한 다정이었다. 하지만 어색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확신은 그런 거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귀국 후 결행한 나의 이혼에 대한 위로와 격려였다. 독일에서 20년 이상 살다 온 그는 분명 한국인이지만 우리말이 유창한 외국인이었다. 한국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이라면, 그렇게 많은 스탭들이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관계였던 나를 위로하겠다고, 그렇게 불쑥 다정할 수 없다. 절대로 못한다. 그러나 그는 내면이 외국인이었고, 무엇보다 나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했고, 그의 세계관으로는 포옹만한 위로가 없다고 확신했던 듯하다.


     실제로 당시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에게서조차 받아보지 못했던 가장 진심 어린 위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들은 이혼을 일종의 스캔들로 간주한다. 당사자로서는 생애 가장 소중했던 일정 기간의 삶을 어느 날 갑자기 없었던 일로 만들어야 하는 크나큰 아픔인데도 흔히들 이혼 사유만을 궁금해하느라 아픔을 놓친다. 그는 이유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아주었을 뿐. 나와 가까웠던 지인들은 오히려 나의 아픔보다는 나의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만을 가늠하기 바빴기에 위로까지는 나아가지도 못했다. 그는 차라리 나와 가깝지 않은 관계였기에 그 거리감에서 기인한 좁은 통로를 통해 단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는 가장 그답게 다정을 선택했다.


     이쯤되면 우리는 분명 그가 내게 이성적 감정이 있었다고 우기고 싶어진다.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들은 세상 모든 남녀들을 엮어야 속이 시원한 민족이니까. 하지만 그와 나는 다만 공연 관계자였을 뿐이다. 그는 모든 관계에 대해 인간적인 접근방식과 이해도를 지닌 다정한 남자였다. 그뿐이다.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 그의 다정은 그에 대한 다른 모든 기억들을 밀어내고 오롯이 각인되어 있다. 오십 해를 살면서 내가 겪었던 모든 다정들을 압도하는 기억으로, 그는 내게 영생할 예정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다정하자. 다정은 무우척 힘이 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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