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생활연구 - 사생활정경 제26권
〈결혼 계약(Le Contrat de mariage)〉은 1835년에 《샤를-베쉐(Charles-Béchet)》에서 〈사교계의 왕(La Fleur des pois)〉이라는 제목으로 「사생활 정경」으로 분류되어 출간된 소설이다. 이후 《베쉐》에서 복간되었고, 1839년에 《샤르팡티에(Charpentier)》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1842년에 《퓌른-헤첼(Furne-Hetzel)》에서 〈결혼 계약〉으로 제목을 변경해 지오아치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헌정으로, 『인간희극』 제3권의 「사생활 정경」으로 분류되어 출판되었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서간체 형식과 화자 서술 방식을 번갈아가며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결정적인 역할은 드러나지 않고 그 윤곽만 그려져 있다. 이제 막 “인물 재등장” 기법을 고안해낸 발자크는 나중에 『인간희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인물들 중에서 〈골짜기의 백합(Lys dans la vallée)〉의 주인공 펠릭스 드 방드네스(Félix de Vandenesse)를 이 소설에 등장시킨다. 또한,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의 루시엥 드 루벰프레(Lucien de Rubempré)와 보트랭(Vautrin)을 연상시키는(보트랭이 오페라극장에서 루시엥 드 루벰프레의 성향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 〈황금빛 눈을 가진 여자(La Fille aux yeux d'or)〉의 앙리 드 마르세(Henri de Marsay)나 으젠 드 라스티냑(Eugène de Rastignac)처럼 이 소설에서는 폴 드 마네르빌(Paul de Manerville)이라는 인물을 통해 파리(Paris) 멋쟁이들의 무위도식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소설의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
돈 많은 구두쇠 아버지 밑에서 곤궁하게 자라난 폴 드 마네르빌은 유능한 공증인 마티아스(Mathias) 덕분에 막대한 아버지 재산을 상속받게 되자 쾌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고향인 보르도(Bordeaux)의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는 보르도를 떠나 파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교계 명소들을 누비고 다닌다. 파리 사교계를 어느 정도 즐긴 뒤에 그는 보르도로 돌아가 결혼 상대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보르도로 돌아오자 폴은 보르도 상류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그의 가문의 이름만으로도 상류사회 부호들의 대접을 받을 만했던 것이다. 어느 나이든 후작부인이 그에게 “사교계의 왕”이라는 별칭을 붙여줄 정도였으니, 그는 당연히 혼기가 찬 딸이 있는, 보르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망 높은 에반젤리스타(Évangélista)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다. 에반젤리스타 가문의 혼기 찬 딸인 나탈리(Natalie) 역시 “사교계의 여왕”이었기에 최적의 결혼 상대인 셈이다. 예쁘고 부유한 나탈리는 은행가의 미망인인 어머니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대단히 평판 좋고 인기 있는 에반젤리스타 대저택의 파티에서 폴은 에반젤리스타 모녀로부터 호의로 가득한 환대와 적극적인 유혹을 받는다. 당연히 그는 나탈리와 사랑에 빠진다. 그의 친구 앙리 드 마르세는 나탈리와의 결혼을 극구 만류하지만 폴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대고모인 몰랭쿠르(Maulincour) 남작부인이 나서서 나탈리와의 결혼을 추진하게 되고 에반젤리스타 모녀의 결혼 승낙을 받게 되는데, 남작부인은 모녀가 결혼을 서두르는 듯한 분위기에 약간의 의구심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작부인은 집안의 공증인인 마티아스에게 결혼 계약 문제를 일임한다. 에반젤리스타의 공증인 솔로네(Solonet)는 나이 많은 마티아스를 과소평가해 경계하지 않지만, 마티아스는 에반젤리스타 모녀가 솔로네와 짜고 폴의 재산을 갈취할 조짐이 있다는 걸 간파하고 폴의 재산 손실을 막기 위해 폴의 재산을 함부로 처분할 수 없도록 세습 재산을 지정한다. 즉, “유언장에 의거하여 소유주가 양도할 수는 없지만 소유주 사망 시 법에 따라 소유주의 상속인에게 증여되는 상속 재산”으로 지정해둔다. 결국 폴이 먼저 죽거나, 남자 상속인이 없거나, 그 외에 일어나기 힘든 수백 가지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할 경우에만 폴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노련한 마티아스가 이런 예민한 조건들은 세부사항으로 은폐해 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솔로네도 에반젤리스타 모녀도 이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대한 결혼식과 피로연이 치러진다.
결혼 후에야 상속 재산의 요건을 알게 된 에반젤리스타 부인은 격분한다. 엄청난 낭비벽과 음흉한 계산속을 지닌 에반젤리스타 부인은 폴의 재산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에반젤리스타 부인은 나탈리에게 “내 딸이 남편의 재산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모습을 봐야만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내 딸이 자신의 집과 재산을 동등하게 나눠주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모든 걸 공동으로 소유하는 걸 당연시하는 남편과 함께 살아간다면 말이지.”라고 말하며 나탈리가 폴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지도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나탈리에게 “그러니까, 너랑 네 남편 사이에다 사교계라는 장벽을 놓아야 해. 무도회며, 오페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쏘다니는 거야. 폴에게는 도통 시간을 내주지 않는 거지. 이렇게 하면 폴은 너에 대해 계속해서 안달복달하게 될 거야. 부부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 인생의 동반자라는 감정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내 모든 게 고갈되고 기나긴 권태와 혐오만 남게 되는 거야.”라고 부추긴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나탈리는 사교계를 부산하게 누비고 다니며 치명적인 바람둥이가 된다. 결혼 후 2년이 지나자 폴은 집에 혼자 비참하게 남겨진다. 에반젤리스타 부인은 나탈리와 함께 쏘다니며 명의 대여인 레퀴에(Lécuyer)를 내세워 막대한 빚을 져 폴의 재산을 탕진한다. 앙리 드 마르세는 에반젤리스타 부인을 “치마 입은 마스카리유(Mascarille)”라고 비꼬아 부른다.
결혼하고 5년이 지난 뒤, 결국 폴은 재산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폴 부부에겐 자식이 없었기에 폴은 나탈리를 버리고 인도(Indes)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폴은 나탈리에게는 재산 분할을 제안하는 편지를 쓰고, 친구인 마르세에게는 자신의 불행을 토로하는 편지를 쓰고는 인도를 향하는 배에 오른다. 배에 오른 뒤에야 폴은 마르세와 나탈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서 나탈리는 임신했다고 알리며 당장 돌아오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마르세는 편지에서 에반젤리스타 부인이 나탈리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그녀의 남편을 파산시킨 이력이 있다면서 에반젤리스타 모녀가 부유한 남자를 유혹해 올가미를 씌우는 수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나탈리의 임신 역시 속임수에 불과하다며, 펠릭스 드 방드네스와의 간통으로 가진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준다. 마르세는 그래서 폴의 결혼을 극구 만류했던 건데, 폴은 “이 모든 걸 보지 못하고 스스로 구덩이를 파서 꽃으로 덮어버렸다”며, 돈은 자신이 대줄 테니 어서 돌아와 함께 정부를 타도하는 데 힘써달라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사랑 따위는 동정녀에 대한 완벽한 환상과 다르지 않으니, 돌아와서 못생기고 돈 많은 영국 여자와 결혼해서 그녀가 제공하는 막대한 재산은 누리면서 언제든 원하는 사람과 바람이나 피면서 살면 되는 거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폴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폴이 탄 배는 이미 아소르스 제도(Açores)를 지나쳐 인도를 향해 가고 있다.
발자크는 자신의 여동생 로르 쉬르빌(Laure Surville)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게 근사하게 완성되었어. 나는 젊은 공증인과 나이든 공증인의 결투인 결혼 계약 장면 하나로 폴과 나탈리의 미래 전체를 표현했어.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장면이어서 이 장면에서 벌이는 계약 논쟁이 매우 흥미로울 거야.”
이 소설은 결국 계산속이 빠른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희극』의 전형적인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엄청난 재산을 탕진하는 인물(카디냥(Cadignan) 공주처럼)이나 경박하고 뻔뻔한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에반젤리스타 부인은 낭비벽만 심한 게 아니라 인색하고 비열하기까지 한데다 터무니없이 엄청난 돈을 노리는 음흉한 계산속을 지니고 있다. 이 인물은 다른 소설에는 재등장하지 않는다. 나탈리는 〈이브의 딸(Une fille d'Ève)〉에서 마리-앙젤리크 드 방드네스(Marie-Angélique de Vandenesse)와 그녀의 남편 펠릭스 드 방드네스(Félix de Vandenesse)의 사랑을 몹시도 질투했던 바로 그 위험인물이다.
▶ 프랑스어판 위키피디아 번역
▶ 볼드 처리된 부분은 원작 그대로를 번역해 인용한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