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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Apr 02. 2023

슬퍼서 아름다운

떡볶이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탄수화물인 줄. 떡볶이를 조리한 후 혼밥에 걸맞는 예쁜 플레이팅을 마치고, 화이트 와인 코르크를 열 때만 해도 다소 매콤한 떡볶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전날 장을 볼 때부터 갑자기 와인이 무우척 당겨 화이트 와인을 4병이나 사 제끼면서도 몰랐다. 더워서 목이 마른 줄.


화이트 와인을 시음하려 홀짝, 했는데 갑자기, 너무나 놀랍게도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헐, 이건 아니지.. 기습에 당황해 짐짓 모른 척 떡볶이를 집어봤지만 오전 내내 심각하게 여겨졌던 허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욕심껏 잔을 채운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조해진의 소설집을 열어봤지만 이 역시 실패. 이미 목까지 차오른 슬픔은 넘치는 수밖엔 달리 해답이 없었다. (이미 슬펐는데 조해진이 웬 말인가)


외롭지 않다. 뭐 그리 힘들지도 않다. 이보다 외롭게도, 이보다 더 위태롭게도, 이보다 훨씬 더 허무하게도 살아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다 해보고도 다시 밀려드는 슬픔. 슬프고 아름다운, 아니 슬퍼서 아름다운 살아있음에 무릎이 꺾인다.


삶의 가장 큰 불친절은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기어이 겸손을 가르치려는 삶이 슬프다. 아니, 아니, 이건 내 꺼야, 라고 우기지 못하는 나의 자각에 신물이 난다.


이모는 결혼 초부터 매를 맞았다. 애 낳고 살다 보면 나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 출산이 이어졌다. 의처증은 병이다. 저절로 고쳐지지 않는다. 아들딸들이 결혼해 출가하도록 매질은 이어졌고, 다 큰 아들이 어머니를 매질하는 아버지를 죽여버리겠다고 칼을 들고 설치는 해프닝도 수 차례 이어졌지만 의처증은 기나긴 세월을 고집스럽게 버텨냈다. 이모를 해방시킨 건 남편의 바람이었다. 바람 난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고서야 이모는 해방됐다.


그런데 산다는 게 때론(아니, 실은 시시각각) 참 모욕적이다. 가까스로 폭력에서 벗어난 이모는 그때부터 경제적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혼자 산다는 건 경제적 자립이 기본 전제이다. 가진 거라곤 주부 경력밖에 없는 이모는 식당을 전전하며 그저 늙어갔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온다고, 올바른 심성으로 살다 보면 반드시 시커먼 밤을 지나 반짝이는 아침이 온다고 외쳐대는 갖은 주장들은 다만 그들의 부유한 상상력일 뿐이다. 혹은 본인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미처 깨닫지 못한 철없는 자존감이다. 처참하게 외로운 적도 가난해본 적도 없는, 배 터지게 부유한 인간들의 저만의 상상일 뿐이다. 혼자서 외진 골방에서 죽도록 노동하던 이모는 혼자서 죽었다. 그 올곧은 마음에 자식도 친척도 그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않은 채 혼자서 죽었다. 이모는 올곧았고, 그 올바름으로 죽도록 노동했고, 그 올바름으로 홀로 죽었다.


나라도 그랬을 듯하다. 그러니 내일은 내일에 맡겨야 한다. 세상 누구도 나의 오늘엔 관심없다.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나만큼 애틋하지 않다. 그런데, 그래서, 이토록 내게만 유의미하고 무진한 오늘만을 살아야 할 텐데, 내일은, 또 어제는 뭐 이리 말이 많은지.


그래서.. 발 밑이 언제 푹 꺼져 버릴지 모르는 이 살아있음에서 가장 단단한 건 어쩌면 그저 와인 한 잔, 떡볶이 한 그릇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그래서.. 달아난 입맛과는 무관하게 와인 반 병과 떡볶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역시 난 믿음직해. 믿을 건 나밖에 없어..


음.. 이거면 됐어.. 적어도 오늘의 허무는 이 정도면 충분히 다스릴 수 있어.. 라고 또 생에 속는 척해본다. 그 외엔 달리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창밖으로 잔인한 4월의 봄날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슬픔을 감추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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