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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Mar 09. 2024

추락의 해부

나는 왜 나여야만 하는가

다락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위태롭다.

유명 작가인 아내가 1층 거실에서 젊은 여기자와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순간에 3층 다락으로부터 통렬한 음향의 보사 음악이 울린다. 집안의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음량이다. 아내는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인 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래도 오늘 인터뷰는 어려울 듯하다며 간단히 인터뷰를 중단한다. 다른 날 다른 방식의 인터뷰를 기약한 뒤 젊은 여기자가 외딴 작가의 집을 떠난 뒤, 맹인 안내견과 함께 아직 어린 아들이 눈 덮힌 산중 외딴 집을 나서 눈길 산책을 시작한다. 그 직후 3층 다락에서 남편이 추락한다. 희디흰 눈바닥에 시뻘건 피로 여울진 아빠를 산책에서 돌아온 아들이 발견한다. 추락의 시작이다.


라고 예상되는 순간, 실은 이미 전개다.

추락의 서막은 그보다 훨씬 이전, 아들의 시신경 손상에서부터였다.

사고는 전조가 없다. 하지만 불행은 기나긴 전조로 점철된다. 부디 이게 마지막이길 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아슬아슬한 불행의 전조들.


부부는 글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하교하는 아들을 번갈아 데리러 가는 패턴이었는데 남편이 데리러 가야 하는 날에 글을 쓰다 늦었고, 혼자 길을 건너던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해 시신경이 영구 손상되었다. 꼬박 일 년이 소요된 치료 기간 동안 막대한 병원비로 가정 경제가 내려앉았다. 남편은 궁여지책으로 도심의 집을 팔고 산골 3층집으로 이주했다. 이 결행으로 인해 도심과 멀어진 만큼 벌이도 쉽지 않아서 민박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남편이 직접 집 수리를 시작했다. 주변에 집 한 채 없는 외딴집이었기에 아들의 교육 역시 남편이 직접 홈스쿨링을 결정했다. 남편 스스로 내린 이들 결정은 사실 이미 와해되어 가던 그의 마음 상태를 반영한 것들이었건만 아내는 외면했다. 집 수리에 아들 교육까지 자처한 덕에 분에 넘치는 집안일로 쩔쩔매던 남편과 달리 아내는 소설 출간으로 승승장구했다.


남편은 억울해진다. 나도 글 잘 쓰는데. 나도 아내처럼 집안일 부담 없이 글에만 몰두한다면 베스트셀러 자신 있는데. 사실 아내 글은 내 꺼다. 언젠가 아내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공유했던 소재마저 아내가 자기 소설에 도용했으니. 프랑스에 살면서 불어 대신 꿋꿋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이기적인 아내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내면의 모든 불길이 아내를 향해 타오른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실은 죽도록 증오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자신을 버려야 하기에 남편은 사력을 다해 아내를 증오한다. 그러기로 작심한다.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모든 시야를 가리고 온 세포 속에 증식해 갖은 양태로 발현된다. 원고를 넣은 서랍을 잠그고, 부부싸움의 크고 작은 폭력을 녹음 파일로 기록한다.


아내는 건강하다. 자신을 외면하는 남편을 들볶는 대신 건강한 몸으로 남녀 구분 없이 성생활을 향유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아들은 눈이 조금 불편할 뿐 여느 또래와 다르지 않게 자신의 생을 꾸려 나아가는 중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건강한 사회생활로 작가로서 순항한다.


남편은 외부로, 아내는 내부로 불을 뿜는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빚어낸다. 만일 아들의 사고가 아내의 몫이었다면 이들 부부의 추락은 또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국적으로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언어만큼이나 부부는 각자 자존을 지키는 방식이 다르다.


일 년 넘게 법정 공방이 이어진다. 남편 살해 혐의로 온갖 매체를 도배하지만 여자는 견고하다. 저토록 견고한 내면에서 빚어낸 글이 대중에게 외면 받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배경음악으로 쇼팽이 반복된다. 강인했던 조르주 상드와 유약했던 쇼팽.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상드가 살롱에서 사교 활동을 하는 동안 혼자 외딴 집에서 며칠씩 고통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빗방울 전주곡을 작곡하던 쇼팽. 그들 자신을 넘어설 수 없어 언제나 아슬아슬했던 세기의 사랑.


최종 선고 하루 전날에야 아들은 기억해낸다. 언젠가 갑자기 안내견이 미동도 하지 않아 황급히 동물병원을 향해 차를 몰던 아빠가 했던 말을. 언젠가는 안내견이 아들의 곁을 떠날 수 있다고. 너무나 고단해서 쉬는 게 오히려 편안한 날이 올 수 있다고. 당시엔 몰랐지만 그날 안내견은 아빠가 음독 자살을 시도하다 토해낸 토사물을 먹었었다는 진실을 법정 공방 속에서 캐낸다.


사실이 너무 많으면 진실은 묻히기 마련이다. 아들의 실명, 산골로의 이주, 경제적 궁핍, 부부싸움, 남편의 우울증, 아내의 양성애적 외도, 베스트셀러. 어지럽도록 늘어선 사실들 속에 파묻혔던 진실은 오직 하나.


누구나 나는 나여만 한다는 거.

산다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의 끝없는 추락이다.


지난한 시간들을 버텨낸 그녀를 아들이 꼬옥 안아준 다음 아들 방을 나와 그녀는 혼자 거실 소파로 무너지듯 눕는다. 그 옆으로 안내견이 조용히 올라와 나란히 눕는다. 엔딩씬이다. 끝나도 끝이 아닌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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