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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냥 공주의 비밀

풍속생활연구 - 파리생활정경 제8권

by 글섬

작품 배경


〈카디냥 공주의 비밀(Les Secrets de la princesse de Cadignan)〉은 1839년 《프레스(La Presse)》 지에 〈파리의 공주(Une princesse parisienne)〉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후, 《퓌른》 판본의 『인간희극』 제11권에 포함되어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파리생활 정경」으로 분류되었다.


여성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연구 중 하나인 이 소설에는 〈골동품 진열상〉에서 복고왕정 시절 20대 초반의 나이에 데뷔하여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화려하게 군림하던 전형적인 요부 이미지의 ‘디안느 드 모프리뇌즈(Diane de Maufrigneuse)’가 스무 살 난 아들 조르쥬 드 모프리뇌즈(Georges de Maufrigneuse)의 혼사만을 생각하며 은거하는, 30대 후반의 은퇴하고 전락한 조촐한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전통사회라면 평온했을 디안느의 삶이 시민혁명으로 도래한 근대사회에서 경제적이며 사회적으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디안느는 몰락귀족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는 발자크의 작품 세계에서 주요한 인물들이 대거 재등장한다. 영원한 두 댄디, 외젠 드 라스티냑(Eugène de Rastignac)과 막심 드 트라이유(Maxime de Trailles), 그리고 데스파르(d’Espard) 후작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사소한 음모의 살롱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되고 미묘한 유혹이 벌어진다.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에서 왕정복고 시대였던 1821년에 진정한 ‘근대적 주체’로서, 뤼시앙 드 뤼방프레(Lucien de Rubempré)가 진정한 작가가 되도록 독려했던 세나클(Cénacle)의 현명한 조언자이자 순결한 청년기의 모습이었던 다니엘 다르테즈(Daniel d'Arthez)가 이 소설에서는 7월 왕정의 1833년에 38살의 중년으로, 여전히 “고결하고 명석하며, 지혜롭고 학구적”인 생활 방식을 견지하는 금욕주의적 철학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녀의 방에 기거했던 가난한 다르테즈가 이 소설에서는 저명한 문필가로 성장해 상류 사회를 드나들며 자신만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1833년 5월 어느 봄날, 디안느 집의 작은 정원에 자스민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서 디안느는 데스파르 부인에게 인생과 사랑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의적인 고백 담론들을 펼친다. 그러던 중에 디안느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었던 미셸 크레티앙(Michel Chrestien)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자 데스파르 부인이 다니엘 다르테즈와의 만남을 제안한다. 다니엘 다르테즈는 이제 삼촌의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 안정을 이룬 남작으로, 우파 국회의원직을 수락한 사회 지도층 인사였지만, 무척이나 곤궁했던 청년 시절처럼 여전히 검소하고 진지했다. 여전히 자신의 저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다르테즈는 고매한 여성들의 세련된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기에 더욱 쉽게 유혹될 만한 상대였다.


카디냥 공주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화려한 과거와 교태로 유명했다. 그러나 7월 혁명의 여파로 공주는 그녀가 주관하던 살롱을 데스파르 후작부인에게 넘겨주고 사교계에서 은퇴하여 아들 조르주를 돌보며 살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과거 그녀의 연인들의 초상화가 즐비해 있다. 카디냥 공주는 숱한 환상에 빠져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훔치는 유희를 즐기며 살아왔다. 다르테즈의 친구인 미셸 크레티앙도 그런 남자들 중 하나로, 금세 공주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의 그물망에 포획된 채, 말 그대로 사랑으로 인해 죽어갔다.


디안느는 데스파르 부인 살롱에서 다니엘과 처음 만난다. 예상대로 다니엘은 쉽게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순결한 시인 다니엘을 상대로는 그 “소중한 사랑과 생명의 불씨”를 키우려는 듯, 무척이나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언행을 보인다. 그녀는 명문가의 귀족 출신답게 유명한 시인 다니엘에 대한 찬양의 감정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 의연함을 보이며 사랑할 준비를 갖춘다. 그리고는 다니엘이 쓴 문학 작품들을 구입해 읽고, 현대 문학과 비교한다. 그가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그의 글과 그녀의 아들, 그녀의 여성스러운 고통 등 사적인 이야기를 고백함으로써 다니엘을 감동시키고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의 살롱에 출입이 허락된 유일한 남성으로서 그를 받아들인다. 그는 밤낮으로 그녀를 방문해 문학이나 다른 공상적 주제에 관해 그녀와 대화한다.


그러던 어느 날 디안느는 비로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다니엘에게 털어놓게 된다. 명문의 위셀(Uxelles) 가문 출신인 디안느 드 모프리뇌즈는 당시의 풍습대로 수도원으로 보내져 수도원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때문에 결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17살의 나이에 거의 20살이나 연상인 카디냥(Cadignan) 왕자와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이 더욱 불행한 것은, 남편인 카디냥 왕자가 그녀의 어머니인 위셀 공작부인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공작부인은 추문을 막고 자신의 평판을 지키려 딸 디안느를 서둘러 자신의 애인인 카디냥 왕자와 결혼시켰던 것이다. 결혼 후 그녀의 기쁨은 오로지 아들뿐이었다. 사회는 그녀의 무분별하고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험담을 해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어머니는 디안느에게 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뉘우쳤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어린애 취급하면서 그녀를 업신여겼다. 그녀는 결국 고독 속에서 위안을 찾으면서 세상과의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사랑의 희망을 되살렸던 미셸 크레티앙이 죽음을 통해 그녀의 무감각과 냉정한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구했다고 여겼다. 이 고백을 듣고 다니엘은 눈물을 흘린다. 디안느가 비록 자신이 남자들을 모독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처녀이자 순교자로서 사랑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하자 다니엘은 그녀가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다니엘은 그녀가 성스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공주는 과거의 오류를 극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다니엘의 확신을 부정한다. 그러자 다니엘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설명한다.


이렇게 정교하고 정성스런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불씨를 살려가는 그들의 사랑 스토리는, 마침내 다니엘에 대한 사랑과 디안느의 자기변명인 그 ‘신비로운 장미’의 ‘비밀들’에 대한 깊은 고백으로 상승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디안느는 자신의 살롱 안락의자에 앉아서, 마치 자신의 깊은 상처와 병력을 고백하는 환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온갖 위장과 변명, 전이 등의 복잡한 방식을 통해 자신의 길고도 격정적인 고백을 다니엘에게 토로한다. 이로써 두 연인 사이에 유동하는 사랑의 에너지가 상호 투사되면서 전이되어 승화된다. 현실의 고통들을 보상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의 대상들을 찾아온, 도착적인 디안느의 깊은 상처와 콤플렉스 혹은 “욕망의 쾌락들”과 같은 그녀의 ‘비밀들’은 마침내 “진정성의 시인” 다니엘의 사랑을 통해 정화된다. 그리하여 카디냥 공주는 진정한 마음을 심층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사랑을 통해 그녀의 삶을 재탄생시킨다.


한 달 뒤, 데스파르 부인이 디안느를 방문했을 때 디안느는 데스파르 부인의 살롱에는 다니엘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진정으로 다니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스파르 부인의 살롱에 다니엘과 그저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라고만 둘러대고 싶었던 디안느의 바람과는 달리, 다니엘은 기꺼이 데스파르의 살롱으로 달려가 디안느를 변호한다. 그 살롱에 모여 있던 라스티냑, 블롱데, 아쥐다 핀토, 막심 드 트라이유, 빅튀르니엥, 방드네스 형제, 뒤 티예, 뉘싱겐, 나탕, 레이디 더들레이, 데스파르 기사 등, 하나 같이 카디냥 공주에 대해 험담을 일삼던 일군의 “공주의 암살자들” 앞에서 다니엘은 디안느가 이제껏 남자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부도덕한 행위는 그녀 역시 그녀 삶에 몰아친 재앙의 희생양이었기에 그 재앙에서 스스로를 구해내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뿐이었다고 열정적으로 변호한다. 모두가 다니엘의 열정적 변호에 감동한다. 그리하여 연인 다니엘의 진정한 사랑의 변호 덕분에, 이미 내면적으로 승화된 디안느는 “지옥의 강과도 같은 파리”의 사교계에서 “변덕스런 팜므 파탈”로서의 악명에서 단숨에 벗어나면서, 사회적으로도 재탄생한다.


이렇듯 “진실한 감정과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그들의 사랑의 드라마는, 디안느가 자신의 고백에서 표현하듯이, “파국을 향해 내달리는 일련의 행동들, 담화들, 운동들”의 과정들을 거쳐, 이제 다시 풍요로운 가슴을 되찾은 디안느와, 그녀의 생명을 되살려주는 숭고한 시인 다니엘의 “행복한 사랑과 생의 희열”로 귀결된다. “애당초, 그녀로서는 진정한 사랑을 알고 싶은 욕망에 이끌렸었다. 이제, 그녀는 그런 사랑이 가슴 속에서 돋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다니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변호를 마친 다니엘은 디안느에게로 간다. 그들은 그녀의 외딴 시골 별장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




분석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발자크 문학세계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재등장하여 폭넓은 관계망을 이루면서, 흡사 『인간희극』의 축소판 같은 가교소설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남녀 주인공인 다니엘 다르테즈와 디안느 드 카디냥을 중심으로, 다른 소설들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발자크 문학의 여러 주요 인물들이 다시 등장한다. 즉, 1839년 이전에 창조된 인물들이 이 작품의 주요 공간인 데스파르 부인의 살롱에 다발성으로 등장함과 더불어, 그들 중 일부는 차후 다른 작품들에서 주인공 역할로 다시 등장하고 변모하면서 소설적 입체감을 얻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중편 정도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이듬해인 1840년부터 구상이 시작되어 2년 후 드디어 방대한 총서로 결정화되는 『인간희극』의 내적 체계에서, 그 전단계적 구도가 포착되는 독특하고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이 대부분 전통적인 귀족계급이거나, 혹은 7월 혁명 이후에 등장한 시민계급의 실력자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발자크는 먼 과거가 아닌 근접한 1830년, 당시 시민혁명 이후의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전통성과 근대성이 공존하면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19세기 초반기 프랑스의 리얼리티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인공 카디냥 공주와의 사랑이라는 관점으로 서술되는, 미쉘 크레티엥의 성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7월 혁명의 여파인 ‘생 메리 성당의 봉기’에서 전사한 그는 발자크 문학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자유파 공화주의자(Républicain libéraliste)’ 주인공이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그의 친구인 다니엘 다르테즈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넘겨주고, 이후 〈잃어버린 환상〉에서 잠깐 그 편린을 보이고는 『인간희극』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는 무척 독특하고 희귀한 인물이다. 즉, 그를 통해서 7월 혁명의 직접적인 묘사와, 시민혁명 이후 프랑스 근대성의 전개 양상의 일면을 포착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특성은 무엇보다 디안느와 다니엘의 사랑 스토리를 중심으로 축조되는 그 농밀한 ‘분석소설(Roman d'analyse)’적 측면에 있다. 마담 데스파르의 살롱과 카디냥 공주의 살롱에서 발화되는 대화가 소설의 전반적인 구성으로 구축되면서, 그 주제는 일종의 ‘사랑의 심리학’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19세기 전반기의 ‘살롱문학’, 즉 ‘살롱’이라는 공간에서 사랑과 심리 분석에 관한 대화와 성찰로 구성되는 소설의 한 전형적인 예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중심 주제는 두 주인공인 디안느와 다니엘의 사랑 스토리로서, 그 전체를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었지만 복고왕정 시대에 수많은 스캔들을 경험하고 은퇴한 디안느가 순결한 심성을 지닌 시인 다니엘을 통하여 다시금 사랑의 마음과 삶, 즉 생명의 원천을 되찾는 재탄생의 이야기’라고 요약해볼 수 있는데, 이러한 중심 주제를 집중적으로 탐색하는 분석적 깊이로 인해 ‘인간성 전반에 대한 성찰’이라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모랄리스트’ 전통을 계승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저무는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의 마지막 불씨였던 복고왕정을 극복하고 근대 프랑스로 나아가는 결정적 모멘텀인 7월 혁명 전후의 시대를 형상화하는 이 소설은 근대성으로 완전히 이행하기 직전의 프랑스, 즉 전통성과 근대성이 공존하면서도 근대사회로 그 중심축이 이동해 가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이다. 프랑스 전통귀족의 계보를 잇는 카디냥 공주라는 인물을 통해 거의 완전하게 몰락해가는 명망 높은 귀족계급의 편린과 그 생생한 현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희극 을 통해서) 난 근대사회라는 이 엄청난 괴물의 모든 면면들을 그려내고 싶었소. 나는 머릿속에 하나의 사회 전체를 담고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소.”라고 밝히고 있다. 요컨대, 근대성과 사회성의 탁월한 형상화라는 관점에서 이 소설은 발자크가 그의 문학적 야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표현하는 그런 고백에 진정 부합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발췌 논문 : 〈발자크, 『카디냥 공주의 비밀들』, '전통성-근대성'의 전환과 표상〉, 임헌(인하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 작품 배경 / 줄거리 / 분석 모두 상기 발췌 논문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하거나, 불어판 사이트의 경우엔 제가 번역해서 발췌 및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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