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생활연구 - 파리생활정경 제11권
〈피에르 그라수(Pierre Grassou)〉는 1840년에 발자크가 낭만파 거장들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등과 더불어 문인협회의 재정을 돕기 위한 작품 선집 〈바벨(Babel)〉에 발표한 소설로, 이후 『인간희극』의 「파리생활 정경」으로 분류된다.
이 작품은 ‘살롱’에 관한 서술로 시작하여 단 4개의 장면들로 구성되는 짤막한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묘사되는 살롱의 변모 양상은 모더니티 문명으로 이행하는 프랑스 현실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요컨대 루브르 박물관의 ‘살롱 카레(Salon carré)’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화가들의 출품작이 대량으로 증폭되면서 심사위원들의 판단이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살롱이 우수한 작품에 대한 실질적인 선별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초반부에서 발자크는 “1830년 이후로 살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며 1830년 7월 시민혁명을 예술의 대중화와 대량생산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1839년 5월 12일 블랑키(Blanqui)와 바르베스(Barbès)가 주도한 ‘공화파 봉기’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되는 결말 부분을 제외하면, 이 단편소설의 지속 시간은 1832년 12월 초에서 그 다음 해의 가을에 이르기까지 대략 10개월 남짓한 기간이다. 그 동안 4개의 주요 장면들이 설정되는데, 발자크는 단 4개의 장면을 통해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던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문화적 현실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장면은 파리의 나바랭(Navarin) 가에 위치한 피에르 그라수의 아틀리에에 엘리아 마귀스(Elias Magus)가 등장한다. 마귀스는 무명 화가인 그라수가 그려낸 미술사의 걸작들,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La Leçon d'anatomie)〉 등의 모작을 사들이는 유명한 그림 상인으로, 이번에는 포도주병 장사로 벼락부자가 된 부르주아 베르벨(Vervelle) 가족의 초상화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즉,1830년 이후 팽창하는 프랑스의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림 시장과 대중화가의 발생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의 첫 장면에서,주요 인물들인 대중화가 그라수와 그림 중개상 마귀스, 그리고 부르주아 베르벨이 모두 마주친다. 요컨대 그들은 근대적 그림 시장의 메커니즘(생산자,중간상,소비자)을 표상하는 전형들이다. 이후 이 소설은 ‘플래쉬백 기법(Analepse)’으로, 범용하지만 성실한 그라수가 브르타뉴의 소도시 푸제르(Fougères)에서 파리로 상경해서 모작화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라수가 대중화가로 성공하는 이 부분에서 당대의 리얼리티를 지시하는 문화기호들인 지명, 인명, 정치, 제도 등이 집중적으로 언급된다.
그라수가 상업적인 대중화가로 커나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발자크는 정치 제도와의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예술과 권력’의 연계성이라는 거시적인 비전으로 조망한다. 그라수는 제라르 도브(Gérard Dow)의 〈수종(水腫)에 걸린 여인(La Femme hydropique)〉을 표절한 〈1809년에 처형당한 슈앙(올빼미 당원)의 몸단장(La Toilette d’un chouan, condamné à mort en 1809)〉을 1829년의 살롱에 출품하는데, 그 모작이 당시 국왕이던 샤를 10세(1757-1836)의 눈에 띄어 문화훈장을 받음으로써 왕실에서도 주문을 받는 화가로 성공하는 계기가 된다. 1829년이면,1814년에 복귀한 부르봉 왕조(루이 18세와 샤를 10세)의 복고왕정이 1830년 7월 혁명에 의해 붕괴되어 입헌왕정으로 이행하기 바로 1년 전이다. 따라서 시민혁명 전야의 프랑스에서, 브르타뉴 지방을 근거지로 활약했던 슈앙들의 반(反)혁명 봉기와, 그것을 주제로 그린 그라수의 그림은 샤를 10세의 추천작이 될 만한 동기가 충분하다. 말하자면 그라수의 성공은, 창조성을 결여한 표절화가가 정치적 이념에 따른 권력의 보호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한 예가 된다. 이 부분에서 당시 부르봉 복고왕가의 주요 인물들인 샤를 10세, 마담, 오를레앙 공작, 황녀, 황태자 등이 거의 모두 언급되는데, 대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의 격동기에 이 인물들 각각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화기호들이다. 예컨대 오를레앙 공작은 부르봉 왕가의 방계 출신으로,7월 혁명 이후 퇴위한 샤를 10세의 뒤를 이어 입헌군주로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이렇게 그림을 매개로 제기되는 ‘예술과 권력의 상관성’ 테마를 통해서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한 발자크의 통찰력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프랑스 역사와 사회를 거시적인 비전으로 그려내는 발자크 문학에서, 문화기호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두 번째 장면과 세 번째 장면은, 그라수가 그의 화실에서 베르벨 가족(그 부르주아 부부와 외동딸)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희극적으로 묘사한다. 그 장면들이 무척 희화적인 것은, 창조성을 결한 그 표절화가를 천재적이고 위대한 예술가로 우상 숭배하는 천박한 부르주아들의 양태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이 상당히 속물적인 부르주아 출신 작가로서, 근대화 초창기의 탐욕스런 부르주아지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발자크의 모순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근대적 그림 시장과 대중예술의 발생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풍자적 소설의 최대의 아이러니는 네 번째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베르벨이 외동딸 비르지니를 이 전도유망한 대중화가와 결혼시킬 생각을 하면서, 파리 외곽의 빌다브레(Ville-d’Avray)에 있는 별장으로 그가 우상처럼 숭배하는 그라수를 초대하는데, 그곳에는 그 병장수가 거액을 들여 수집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안내하는 베르벨을 따라서 그 명작 컬렉션을 관람하면서 그라수는 그 값진 그림들이 실은 그 자신이 그린 모작임을 알게 된다. 즉, 베르벨은 화상인 마귀스를 통해서 그 그림들을 진품으로 믿고 사들여서 정성껏 그 별장에 진열해 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라수의 모작들 - 화상 마귀스 - 구매자 베르벨’의 시장 회로를 통과한, 소위 그 명작 진열실은 속이고 속는 자본주의적 교환 방식을 압축하는 희화적인 공간이 되고 만다. 그들의 명작 관람이 경악과 폭소의 장면으로 바뀌고 마는 것은, 바로 본질과 외양을 착각하는 부르주아 근대사회의 아이러니컬한 존재 양식에서 기인한다. 더불어 이 그림 관람 장면에서는, ‘루벤스(Rubens), 렘브란트(Rembrandt), 폴 포터(Paul Potter), 미에리스(Mieris), 메추(Metzu),제라르 도우, 뒤릴로(Murillo), 테르부르크(Terbourg),티치아노(Titien)’ 등 서양미술사의 거장들과 관련된 인명들이 언급되며 유익한 문화 교육적 기호들이 제시되어 있다.
순수미 탐구 따위에는 그다지 열망이 없는, “양처럼 순한” 대중화가 그라수는 현실 변화에 무척 순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 부분에서 그라수는 블랑키가 주도하는 공화파 봉기를 분쇄하는 루이 필립의 근위대에서 전투 부대장으로 활약해서 레지옹 도뇌르(Légion-d’Honneur) 훈장을 받는다. 이후 베르벨의 외동딸 비르지니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이 대중화가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오늘날, 피에르 그라수는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전시회에 출품하며, 부르주아 세계에서 훌륭한 초상화가로 통한다. 그는 부르주아 권역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거기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통한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치명적인 한 가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른 화가들이 그를 조롱하고, 그의 이름은 여러 아틀리에에서 경멸의 대상이며, 신문들은 그의 작품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19세기 초반기 근대 시민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상업 예술과 그림 시장, 그리고 대중화가의 발생 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도입부에서 서술되는 프랑스 화단의 상황, 즉 살롱전의 대중화와 경직된 미술 아카데미, 마귀스로 표상되는 그림 중개상과 그라수로 표상되는 상업 미술, 예술성과 대중성, 그리고 모작과 표절의 문제 등이 중요한 문화코드로 부각된다. 특히 ‘예술성과 대중성’ 문제와 관련해서, 예컨대 발자크가 1830년에 쓴 〈미지의 걸작(le Chef-d’œuvre inconnu)〉의 주인공으로, 순수미의 절대탐구가인 프레노페르(Frenhofer)와 대중화가 그라수를 비교해보면,10여년의 시차를 두고 그림 생산의 조건이 너무 변화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근대사회의 예술 소비자인 부르주아지의 구매력에 의한 그림 시장의 발생이 그런 변화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부르주아’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언급되며, 그런 그림 시장에서 부르주아지의 수요에 부응하는 상업적인 화가의 성공이 가능하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초창기 단계의 모작의 생산 양태와 유통 회로를 포착하는 발자크의 통찰력에 주목하게 된다.
그라수가 베르벨 가족을 그리는 장면에서 발자크는 본질과 외양을 혼동하는 그들의 성격과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사회의 두 가지 부정적인 양상인 물신숭배(Fétichisme)와 소외적 사물화(Reification)를 보여준다. 여기서 발자크의 통렬한 ‘반어(Ironie)’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들라크르와가 그 모델이라는 진정한 화가 ‘조세프 브리도(Joseph Bridau)’와 대중화가인 피에르 그라수의 대비적인 모습이다. 나폴레옹 제국에서 복고왕정과 7월 왕정으로 이행하는 격동기에 근대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국 군인들을 이야기하는 〈라 라부이외즈(La Rabouilleuse)〉에서 주요 인물로 그 성장 과정이 묘사되는 조세프는 혼돈스런 모더니티 문명에 매몰되는 『인간희극』의 수많은 군상들과는 달리, 세나클(Cénacle)의 시인 다니엘 다르테즈(Daniel d’Arthez)와 더불어 보기 드물게 주체성을 견지하는 청년 화가이다. 그러나 조세프가 친구인 그라수의 화실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보듯이, 그 피상적인 부르주아들의 눈에는 단정한 옷차림에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아류화가 그라수야말로 위대한 예술가로 보이며, 그와는 대조적으로 헝클어진 외양의 조세프에 대해서는 본질, 즉 그의 천재성과 창조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진정한 화가를 ‘저 촌뜨기 녀석’이라고 부르며, 조세프는 포즈를 취하는 그 부르주아 가족을 보면서 그라수에게 묻는다. “근데, 넌 저것들을 그리는 거야?” 요컨대 조세프와 그라수와 베르벨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부정적인 양상을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둘째는, 발자크는 여기서는 저급한 식물들의 비유로써 그 과시적인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묘사한다. 예컨대 바르벨은 ‘멜론(Melon), 호박(Citrouille), 순무(Navet)’로, 그의 아내는 ‘코코넛(Noix de coco), 적갈색 마호가니(Acajou répandu)’로, 그리고 그의 딸 비르지니는 ‘아스파라거스(Asperge)’로 지칭된다. 이 식물 비유어들의 공통점은 ‘얼간이’라는 함의(含意)를 지닌다는 것인데, 따라서 병 장사로 졸부가 되어 초상화를 위해 그림 상인 마귀스를 앞세우고 그라수의 화실로 들어서는 그 부르주아 가족 전체는 졸지에 ‘우스꽝스런 야채’가 되어버린다. 이 소설의 주석을 보면, “당시에는 인물들에 대한 식물 비유가 유행이었으며, 가장 유명한 비유는 국왕인 루이 필립을 지칭하는 배(Poire)였다”고 한다. 발자크의 묘사 중에서도 단연 압권으로 평가되는 이 희화적인 야채 비유 언어를 통해서 그는 예술성을 결한 상업적인 대중화가 그라수와 그의 부르주아 고객들의 관계로 표상되는 그림 시장의 발생 과정을 보여준다. 발자크는 근대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의 한 단면을 “부르주아는 부르주아를 끌어당기는 법이다”라고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 발췌 논문 : 〈'서양소설과 문화교육'에 관한 단상 - 발자크, 『피에르 그라수(Pierre Grassou)』의 경우〉, 임헌(인하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 작품 배경 / 줄거리 / 분석 모두 상기 발췌 논문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하거나, 불어판 사이트의 경우엔 제가 번역해서 발췌 및 인용한 것입니다.
▶ 볼드 처리된 문장은 불어판 위키피디아에서 번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