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호와 꽃잎의 우연이 인연으로
여름의 햇볕 사이로 그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날은 날씨가 맑고 공기도 상쾌했다. 나는 반가움에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원도남이 나중에 말하길 그날의 내 스타일은 첫 만남과 사뭇 달랐다고 한다. 처음 보았을 때는 수수한 느낌이었는데, 두 번째 만나니 색다른 느낌이었단다. 회심의 아이템, 블랙 미니 원피스! 효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그날 밤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속마음을 이야기하기에 알맞은 때와 장소였다. 그는 나에 대한 마음을 차분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백했고, 나는 못 알아 들었다.
‘계속 만나자’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게 사귀자는 뜻인가? 내일 물어 볼까...
30대 중반의 나이지만 연애 경험이 한참 부족한 나는 헷갈렸다. 변명을 좀 하자면 그 말을 듣고 다음 만남까지 우리가 통화를 하거나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도남이 말하기를 원래 전화는 귀찮아서 안 하는 스타일이고, 갑자기 손을 잡기에는 어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는 형에게 물어봤는데 사귀자는 말을 하는 건 요즘 방식이 아니라며 에둘러 말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헷갈렸지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두 번째 만남 이후 집에 오니 기분은 굉장히 좋았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한 시간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함께 미술관을 둘러보고, 양식당에서 식사하고, 예쁜 카페에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해변을 산책하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의 데이트란 이렇게 신나는 거구나! 주말에 즐겁게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사귐 여부에 관해 크게 개의치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날인 일요일은 영화관 데이트였다.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기로 해서, 내가 챙겨 간 손질한 멜론을 영화 시작 전에 나누어 먹었다. 우리가 본 영화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였는데,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많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만두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는데 비가 왔다. 같이 우산을 쓰는데 처음 만난 날이 생각이 났다. 그날도 비가 와서 그가 나에게 우산을 같이 쓰겠냐고 했는데 그때는 ‘아니요’라고 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우산을 같이 쓸 정도로 마음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빵집을 찾아 가는 길에는 둘 다 길치라서 헤맸다. 지금도 우리는 낯선 길에서 휴대전화 길찾기 서비스를 이용하더라도 헤맨다. 그래도 내가 원도남보다 길 찾는 능력은 좀 더 낫다. 그의 안내에 따르면 엉뚱한 곳으로 가기 때문에 내가 주도해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길을 바로 찾아갈 수 있다. 당시엔 그걸 몰라서 그에게 길 안내를 맡겼더니, 낯선 길을 한참 돌아 다녔다.
길거리에 사주와 타로 간판이 있어서 사주 본 경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사주를 봤더니 ‘겨울의 언 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나는 사주에 불(火)이 많다고 했더니 그는 내가 겨울의 언 땅을 녹여줄 수 있겠다고 답했다. 그 말에 그저 웃음이 났다.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해서 차를 타고 우리 동네에 갔다. 가는 길에 나보고 몇 층 사냐고 묻길래 7층에 산다고 했다. 그는 자기도 7층에 살고 있다며 몇 호냐고 물었다. 704호에 산다고 답하자 본인도 그렇다며 그는 엄청 놀라워했다. 나중에 말하기를 당시 원도남은 우리가 둘 다 7층이라는 것도 신기한데, 704호에 사는 사람을 만난 게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인연이란 게 진짜 있는 걸까? 나는 둘 다 704호에 사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난 봄의 꽃잎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산책을 하는데 벚꽃잎 하나가 내 손안으로 쏙 들어왔다. 벚꽃잎이 흩날릴 때는 잡으려고 애써도 잡기가 어렵다.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제 자리처럼 꽃잎 하나가 손안으로 들어온 게 신기했다. 그래서 꽃잎을 주머니에 잘 넣어 뒀다가 집에 가져왔다. 휴대전화 케이스 안에 넣어서 부적처럼 갖고 다녔는데 그게 효험이 있었던 걸까.
지금도 나로서는 이해가 쉽게 안 되는 것은, 원도남이 내 이름과 나이, 직업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편도 3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먼 지방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건 꽃잎의 힘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휴대전화에 그의 이름을 꽃잎 모양으로 저장한 이유이다.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 되는 걸까. 벚꽃잎이 우연히 내 손안으로 쏙 들어왔듯이, 원도남은 내게 와서 인연이 되었다. 그가 704호라는 우연의 일치를 인연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뜻하지 않은 우연의 순간들 속에 인연의 씨앗이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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