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손편지와 첫 통화

두려움에 맞서는 시간. 마음을 담은 손편지에 처음으로 걸어 본 전화.

by 청풍명월

다음 만남은 2주 뒤였고, 혼자 있는 동안 나는 남몰래 두려움과 맞서는 시간을 견뎠다. 평소에도 겁이 많은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아마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하다는 점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온갖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내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였다. 원도남과 두 번째 만남 이후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그 사람은 내가 바라는 타이밍에 원하는 말을 해 준다.
너무 좋아하게 되는 게 무섭다. 이 사람한테 내가 속수무책 빠질까 봐 두렵다.

2. 그는 내가 소개받은 사람 중에 제일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을 놓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두렵다.

3. 나는 연애 경험이 부족한 데다 감정 표현이 서툴다.
이로 인한 실수로 자책하고 후회하게 될까 봐 두렵다.

위의 세 가지 두려움에 대해 나는 이런 답을 내렸다.

1->한번 빠져 보는 것도 인생에서 한 번쯤 괜찮지 않나?

2->좋은 사람 만난 것도 엄청난 행운이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살아온 만큼 이 행운이 나에게 미소 지어 줄 거라 믿는다.

3.->두려움에 숨지 말고 표현을 열심히 하자! 그래야 잘 안 되더라도 후회는 없을 테니까.

위와 같이 무엇이 두려운지 조목조목 나열하는 것은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체를 들여다 보면 두려움이란 것이 별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 대부분은
실제로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두려움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직면하고 감행하는 것에서 우리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감행하지 않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이며, 행동하면 할수록 통제력은 커진다. 수영장에서도, 그리고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출처 : 정강민, <세네카 씨, 오늘 수영장 물 온도는 좀 어때요?>)

새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내게 익숙하지 않아 두려운 것일 뿐이다. 익숙한 것이 유익하지만은 않듯이, 새로운 것이 해롭지만은 않다. 내가 본가를 처음 나왔을 때 두려움이 상당했지만, 그럼에도 탈출을 감행했기에 나의 내적 성장도 시작될 수 있었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두려움에 직면할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만나서 서로 성장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다행히도 내가 원도남과 만나고 나서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는 건 희망적이었다.

그는 나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호감을 표현하는 그의 능력을 배우고 싶다. 나도 표현을 잘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위와 같은 일기를 쓰고 일 년 정도 지났을 무렵, 원도남에게서 내가 표현을 잘해서 좋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 앞일은 이렇게 알 수가 없다. 성장하고자 한다면, 조금 느리더라도 언젠가 나를 목표한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저런 생각들 속에 시간은 흘러 어느새 만남의 날이 다가왔다. 7월 말의 날씨는 엄청 더웠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잔 하기로 했다. 그와는 처음으로 술을 마시는 거였다. 나는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리면서 신이 난다. 그날도 기분이 좋아져서 말이 점점 많아지고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술집에서 나와서 걷는데 원도남이 손을 잡았다. 앞에 가는 커플이 손을 잡고 간다며 우리도 손 잡자고 했다.

처음으로 손 잡고 걸었는데 그날은 습한 데다 무더위가 극심한 밤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날 술기운의 힘인지 손 잡아서 그런지 몰라도 1만 3천보를 걸었다. 집에 와서 발목이 아파서 봤더니 신발 때문에 쓸려 있었다. 분명 걸을 때 불편했을 텐데 그렇게 많이 걸었다니 웃음이 났다.

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양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식당 밖 풍경이 너무 예쁘다고 했더니 마주 앉은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자기는 더 예쁜 걸 보고 있다고. 쑥스러워서 웃음이 터졌다. 식당을 나와 네컷 사진 찍는 곳이 보이길래 같이 찍자고 제안했다. 그는 좀 어색해 했지만 포즈를 취해 주었다. 나도 남자랑 단둘이 네컷 사진을 찍는 건 처음이었다. 귀여운 머리띠를 쓰고 꽃받침, 손가락 하트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풋풋하기 그지없다. 같이 셀카를 찍기도 전이어서 네 컷 사진은 우리가 함께 찍은 첫 사진이 되었다.

아쉬운 일요일 저녁, 헤어지기 전에 그가 나에게 선물을 건넸다. 과자와 손편지였다. 그에게 받은 첫 손편지였다. 집에 들어와서 편지를 읽자마자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는 강원도를 향해 운전을 하고 있을테니 3시간을 기다렸다. 우리가 처음 본 후로 한 달이 지났지만 서로 통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다림 끝에 그가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가 전화를 걸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원래 전화를 귀찮아해서 내게 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갓 만나기 시작한 사이에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때는 처음 통화하는 기쁨에 별 생각이 없었다. 전화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메모까지 해 두었는데, 그날은 절반 밖에 못 말했다.

첫 통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우리가 2주 전부터 이미 사귀고 있다는 거였다. 나만 썸 타는 줄 알았던 게 우스웠다. 그 손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전화를 걸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나는 아직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헷갈렸을지도 모른다. 손편지는 그의 마음이 온전히 내게 닿도록 전해 주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났는데 내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꿈같이 느껴졌다. 내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일이 언제쯤 일어날까, 그런 기적은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인생에 한 번쯤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믿게 됐다. 내가 누군가로 인해 이렇게 설렐 줄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삶에도 봄이 비로소 오는 걸까. 모든 것들이 경이로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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