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C. 즐거운 일주일을 보내셨나요? 지난번 모임에서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C의 편지를 읽으며, 우리 할머니를 떠올렸어요. 고민 끝에 결국 저도 ‘우리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요. 딱 맞는 답신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C의 ‘내 할머니’처럼, 저에게도 ‘우리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제 엄마의 엄마를 부르는, 저만의 호칭이에요. 저는 우리 할머니를 무척 많이 좋아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저를 보며 늘 하시는 말이 있어요.
“너는 나 올 때마다 막 밀치면서 ‘할머니 가! 할머니 가!’ 그랬어. “
엄마가 바쁘셨던 탓에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 할머니에게 맡겨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애가 할머니만 오면 엄마가 사라진다는 걸 눈치채고, 엉엉 울면서 그렇게 밀어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기억나질 않는데, 할머니는 그게 어제 일같이 생생하고 섭섭하신가 봐요.
그래서 그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휴 됐어’가 입버릇이랍니다. 갈비탕을 좋아하시는 줄 뻔히 아는데, 같이 먹으러 가자고 꼬시면 ‘아휴 나 배불러서 못 가’ 하며 손사래를 치십니다. 팔을 끌어당기며 졸라대면 우리 할머니는 방바닥에 주저앉으십니다. 그럼 저는 한술 더 떠서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마구 졸라요. ‘거짓말 거짓말... 저랑 같이 가요...'
만만치 않은 고집쟁이. 우리 할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온 거실 바닥에 늘어져서 필사적으로 할머니 손을 끌어당깁니다. 할머니를 밀쳐냈던 어린 시절을 조금이라도 무마해 보려고요. 하지만 인제 와서 다 큰 몸으로 무겁게 붙들고 늘어진다 한들 우리 할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작은 몸으로 온 힘 실어 밀어내던 제 손길만 생생히 떠올리십니다.
그래도 있지요, C. 우리 할머니는 틀림없이 저를 사랑해요.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저는 그게 사랑인 줄 단번에 알았어요.
왜냐면요, 저번에 우리 할머니가 저더러 ‘너는 아직 애기다’ 했거든요. 정말요. 우리 할머니에게 저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애기였다고요. 그래서 우리 할머니 앞에서 저는 계속 철없이 조르고 또 조를 수 있어요. 저랑 같이 있자고 맘껏 표현할 수 있어요. 우리 할머니는 제가 극성맞게 졸라댄다고 해도, 쟤가 아직 애기니까, 그러려니 하실 거예요. 그래도 저를 사랑하실 거예요.
한편으론 저도 알고 있어요. 우리 할머니는 저보다 엄마를 더 애틋하게 사랑한다는 걸요. 막내가, 하는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담겨있는지 저는 알아요. 우리 할머니는 당신 막내딸을 그렇게 예쁘게 본답니다. 자꾸 뭘 먹으라고 하고 또 자꾸 뭘 해준다고 한답니다.
엄마가 애기였을 적에, 우리 할머니는 가장이라서 매일같이 장사를 하러 집을 나섰습니다. 엄마 나도 데려가, 하며 쫓아오는 막내를 떼어놓으려고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자꾸 그때를 떠올립니다. 내가 그때 집에서 엄마 노릇을 더 했으면... 내가 그때 맛있는 밥도 더 자주 해서 먹였으면... 당신 딸의 삶이 안쓰러울 적마다 전부 당신 탓을 합니다.
엄마와 달리 제 어린 시절은 우리 할머니와의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우리 할머니가 해준 콩비지 김치찌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고기만 쏙쏙 골라 먹는 손녀를 위해 언제나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끓여 주셨습니다. 방과 후에는 거실에 함께 앉아 티비를 보며 생 고구마를 먹던 것도 기억나요. 우리 할머니는 하나하나 칼로 깎아서 제 입에 넣어주셨고 저는 그걸 모조리 받아먹었어요.
그때 우리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제게 고구마를 깎아주었을까요. 제게 해주신 모든 것들이, 실은 당신의 막내에게는 해주지 못했던 것이라 자책했을까요. 막내와 닮은 제 얼굴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엄마를 닮았고 엄마는 우리 할머니를 닮았습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취향도 닮았어요. 우리 할머니는 식물도, 그릇도 좋아하셔서 집에 온통 그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한 번은 우리 할머니 댁에서 찬장을 열어놓고 예쁜 그릇들을 꺼내보며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릇이 예쁘다고 말하는 제 모습을 보시더니 '나중에 너 가져가라'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나중이 정말이 될까 두려워서 얼른 입을 다물었습니다.
지난번 우리 할머니 댁에 갔을 때에는 베란다에 키우는 식물들의 물 주기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듣고 동영상으로 그 모습을 기록해 두었어요. 언제 또 들을 수 있을지 몰라서요. 당신 집에 있던 거대하고 무거운 맷돌도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엄마와 저는 순순히 그 무거운 걸 받아 들고 집에 왔습니다. ‘안 쓰면 당근마켓에 팔면 되겠지’하고 말하던 것과는 달리, 피아노 옆자리에 고이 모셔두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각자 짝사랑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때에 각자의 눈에서 일방통행의 사랑을 읽어내며 저는 턱 밑이 찌르르 해집니다. 우리 할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할머니의 막내를 사랑해야겠어요. 그래야 우리 할머니를 섭섭하게 했던 어린 날의 저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요?
아녜요. 사실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 할머니는 저를 예뻐해요. 우리 할머니는 저를 좋아해요. 우리 할머니는 저를 사랑해요. 누군가에게는 제가 이렇게 줄줄 써놓는 말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힘껏 크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 할머니는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요.
흔한 호칭에 고작 ‘우리’ 한 단어 더해졌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울렁거리고 좋을 일인지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엉뚱한 곳에서 생채기 나는 대신에 우리 할머니한테 달려와서 실컷 조를걸. 실컷 사랑받고 실컷 사랑드릴걸. 우리 할머니 좋아하는 갈비탕도 더 자주 먹었으면, 우리 할머니 좋아하는 바다도 산도 더 많이 구경하러 다녔으면, 그랬으면 좋았을걸...
언제까지고 옆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요즘 부쩍 느껴요. 저는 우리 할머니 계시는 동안에는 언제나 애기로 살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할머니네 애기로 살 거예요. 더 많이 조르고 더 많이 드릴 거예요. 우리 할머니가 안 받아줘도 저는 그렇게 할 거예요.
지난 편지에서 C가 그랬지요, 할머니의 성을 따라 쓰고 싶다고요. 저도 그래요. 저는 누구도 아닌, 신 씨 계보를 따를 참이에요.
오늘 저녁에 있을 모임에서 이 글을 낭독하면 금방 울어버리게 될 것 같아요.
이만 편지를 줄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