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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Feb 23. 2023

1인분의 토마토를 보냅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채소가 있나요? 저는 토마토를 제일 좋아합니다. 동그랗게 잘 자란 토마토를 보면 만족감이 듭니다. 제가 키운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키워낸 것 중 고운 것들만 골라 세상으로 내보내는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요? 토마토처럼 동그랗고 고운 마음이었을까요.


시원하고 짭짤하고 와삭와삭한 토마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와 딸이 토마토를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간이 흘러서 같은 자리에서 혼자 토마토를 와삭와삭 먹어 치우는 딸이 그 장면을 회상하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그 영화에서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합니다.


엄마랑 같이 먹는 토마토는 제 어린 시절에도 있던 기억이거든요. 어릴 때는 엄마가 설탕 뿌린 토마토를 간식으로 주셨어요. 그걸 맛있게 먹었는데, 이제는 설탕을 뿌리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네요. 엄마나 저나 당뇨 오기 딱 좋은 식습관을 가진 사람들이라서요. 슬프죠.




요즘 저는 혼자 토마토를 먹는 시간이 많습니다. 부모님이 외출하신 동안 집에 남아있는 사람이 저뿐이라서 혼자 밥을 해 먹거든요. 느긋하게 제멋대로 요리해 먹는 1인분의 토마토를,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물에 씻어서 칼로 4등분을 하고, 연두색 꼭지 부분을 조심조심 잘라내면 붉은 몸만 남습니다. 요즘에는 이렇게만 잘라서 구워 먹기를 잘합니다. 집에 ‘자이글’이라고, 위에서부터 열기가 가해지는 조리 기구가 있거든요. 그 밑에 토마토를 일렬종대로 앉혀두고 굽습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탔나?’ 싶을 때까지 구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토마토를 먹을 수 있어요.


토마토가 구워지는 동안에는 다른 준비 작업을 합니다. 밥그릇에 밥을 담고, 후추통을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습니다. 토마토가 적절히 익으면 하나씩 불판에서 꺼내어 먹습니다. 앞접시는 불필요해요. 하얀 밥 위에 빨갛고 뜨끈한 토마토를 바로 올리고, 검은 후추를 살살 뿌려 먹습니다. 다른 반찬 없이도 밥 1 공기를 뚝딱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습니다.




가끔 피곤함에 절어서 일어나는 날이 있습니다. 어중간한 시각인 10시 정도에 눈이 떠지는 주말 아침이 그래요. 그럴 때면 주방 찬장에서 만만한 라면을 하나 집어 듭니다. 뜨끈한 토마토 라면 국물을 먹으면 피로가 녹아들거든요.


냄비에 물은 원래보다 조금 적게 넣고, 라면 수프도 다 넣지 않고 80% 정도만 넣어요. 나머지 빈자리는 토마토가 채웁니다. 이번에는 토마토를 팔 등분합니다. 셀러리도 있으면 잘게 썰어 토마토와 같이 냄비에 넣고 끓입니다. 계란도 있으면 하나 넣어 반숙될 때까지 끓입니다. 마찬가지로 후추를 조금 뿌리고 소금 간을 살짝 해서 마무리합니다. 제멋대로 만든 토마토 라면이 완성됩니다.


토마토의 새콤한 맛이 나는, 평소보다 걸쭉한 국물부터 한 입 합니다. 국물을 마시면 어김없이 피로가 풀려요. 침대 이불속에 두고 온 듯했던 정신이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 들어서고, 뱃속에서부터 뜨끈한 온기가 퍼지면서 온몸에는 활기가 돕니다. 국물이 너무 완벽해서, 굳이 면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어요. 그래도 면을 먹어야 완전하게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됩니다. 그냥 라면을 먹었을 뿐인데 씩씩해지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기력이 허할 때마다 토마토 라면을 그리워합니다. 국밥도 아니고, 토마토 라면을요.




원래 저는 별명이 코끼리일 정도로 채소를 아무렇게나 크게 썰어서 아무렇게나 볶아서 아무렇게나 와앙 하고 소리 없이 먹어 치우는 사람이었어요. 배를 채우기 위해서 요리를 하지,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 요리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정성껏 요리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나 해봤지, 고작 저 혼자 먹을 1인분의 음식을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영영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고요. 하지만 이것도 오래 꾸준히 하다 보니 저만의 취향이 담기고 저만의 레시피가 생기네요. 그래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고요. 이상하고 신나는 일입니다.


그동안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누군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 물어오면 ‘나는 계속 변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그 외의 말은 할 수가 없었어요. 훗날 보기 불편할 지저분한 자국으로 남을 게 뻔해 보였으니까요. 얼렁뚱땅, 지난한 시행착오를 겪는 저 자신을 혐오스러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얼렁뚱땅 몸에 익혀온 토마토 요리가 적당히 맛있다는 건, 얼렁뚱땅 살아가는 저 자신도 적당하다는 증거 같네요. 요즘 저는 선망하던 삶, ‘자신에게 충실하여 분수에 맞는 삶’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적당해서 소중한 1인분의 토마토를 먹으면서요.


C에게,

1인분의 토마토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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