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도시, 무너진 건축: 건축을 둘러싼 미스터리
3부. 혁명과 전쟁, 건축이 무너진 날 (31~50화)
글, 그림 : 이동혁 건축가
1961년 8월 13일.
새벽의 베를린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길지 않았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소련 군대의 차량들이 서쪽으로 이어진 모든 도로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철조망과 콘크리트 블록들이 성급히 쌓여갔고, 사람들은 갑작스레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날 새벽, 베를린은 철저히 두 개의 세계로 갈라졌다.
서베를린은 서독(서방 세계)의 자유와 번영을 상징하는 섬이 되었고, 동베를린은 동독(소련의 영향권) 아래에서 억압과 통제의 상징으로 변모해갔다.
“미쳤군… 그들이 정말로 이걸 만들 줄이야.”
서베를린의 역사학자 하인리히 슈타인(Heinrich Stein) 은 멍한 눈으로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 속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아내 안나 슈타인(Anna Stein) 이 두려운 눈으로 물었다.
“이대로라면 우린 부모님도 못 보는 거야?”
“아마도… 그럴지도 몰라.” 하인리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은 단순히 경계선이 아니었다.
동독 정권은 서방으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 ‘안티파시스트 방어벽’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국민들을 가둬두기 위한 거대한 감옥의 벽이었다.
처음에는 철조망으로 시작되었지만, 곧이어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높이 3.6미터의 벽으로 변모했다.
벽은 155km에 걸쳐 도시를 가로지르며, 수백 개의 감시탑과 참호, 그리고 전기 철조망으로 강화되었다.
“저 벽이 완성되면, 사람들은 영원히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돼.”
하인리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베를린 장벽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러면 선생님, 사람들은 어떻게 그 벽을 넘으려 했어요?”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방법은 많았지. 땅굴을 파거나, 위를 뛰어넘거나, 심지어는 풍선을 만들어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했어.”
“모두 성공했나요?”
“아니.” 하인리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많은 이들이 실패했고, 목숨을 잃었지.”
1979년.
하인리히는 비밀리에 땅굴을 파던 저항 세력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베를린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인리히, 이건 말도 안 돼. 당신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한다면 우리 가족까지 위험해진다고!”
안나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안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방법뿐이야. 난 그들을 돕지 않으면 안 돼.”
하인리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린 그들에게 자유를 줘야 해. 이 장벽은 잘못된 것이야.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가두기 위한 족쇄일 뿐이야.”
1989년 11월 9일.
그날은 베를린의 운명을 바꿔놓은 날이었다.
동독 정부는 실수로 출입 통제를 완화한다는 발표를 내버렸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고, 혼란스러운 군인들은 총을 쏘지 않았다.
“이건 진짜야? 우리가 정말 벽을 넘을 수 있는 거야?”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하인리히, 어서! 서둘러야 해!” 안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군중 속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야.”
하인리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베를린 장벽은 물리적으로는 무너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 장벽은 단순한 콘크리트와 철조망이 아닌, 냉전 시대의 이념과 갈등을 형상화한 건축물이었다.
오늘날 베를린의 관광객들은 장벽의 일부를 바라보며 그 시대의 아픔을 되새긴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항상 말했다.
“장벽은 무너졌어도,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해. 그래야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