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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그렌펠 타워 화재 – 현대 건축의 재앙

사라진 도시, 무너진 건축: 건축을 둘러싼 미스터리

by 이동혁 건축가
3부. 혁명과 전쟁, 건축이 무너진 날 (31~50화)

글, 그림 : 이동혁 건축가


제34화: 그렌펠 타워 화재 – 현대 건축의 재앙

“불타는 고층, 침묵하는 규정, 잊혀선 안 될 그날 밤”


1. 런던의 밤, 불이 깨어났다


2017년 6월 14일.
영국 런던, 켄싱턴 북부.
한낮의 소나기를 머금은 공기가 밤이 되자 무거워졌고,
검은 하늘 아래, 24층짜리 회색 건물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렌펠 타워(Grenfell Tower).
오랜 세월 동안 저소득층 이민자,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공공주택.
낡았지만, 아이들이 뛰어놀고 저녁마다 카레와 양고기 냄새가 골목을 메우던 곳.

오전 12시 54분.
그날 밤, 4층의 냉장고에서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2. 구조 요청, 그러나 너무 늦게


파리드 칼리드, 42세, 시리아 출신 난민.
그는 가족과 함께 18층에 살고 있었다.
이민 온 지 2년. 내전의 폭탄에서 벗어났다고 믿었기에,
런던의 이 조용한 공간은 기적 같았다.

“이건… 농담이지…?”

그는 불안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1층, 3층… 불길은 위로, 마치 벽을 타듯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건물 외벽이 불길에 한 점 붉은 선을 그으며 타올랐다.

“엄마! 불이야! 창문이 뜨거워!”
딸 마르와가 울부짖었다.

파리드는 급히 전화를 들었다.
“911, 긴급 구조를 요청합니다! 18층입니다! 그렌펠 타워가… 불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통화선 너머의 목소리는 무감했다.
“지금은 대피하지 마십시오. 아파트 안에 머무르세요. 문을 닫고 기다리세요.”

Stay put policy.
영국 정부는 고층건물의 화재 시 주민들이 방 안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홍보해왔다.
그러나 이 날, 그 정책은 죽음의 통로가 되었다.


3. 왜 그렇게 빨리 타올랐는가?


불은 단 15분 만에 4층에서 21층까지 치솟았다.
이유는 단 하나.
외벽에 설치된 ‘가연성 알루미늄 복합 패널(ACM)’.

2016년 리노베이션 당시, 건물 외관을 보기 좋게 바꾸기 위해 설치된 이 자재는
불길을 막는 게 아니라, 불길을 돕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자재는 영국 내 주거용 건물에 사용이 금지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값이 싸고 공사 시기가 빠르다는 이유로 선택됐죠.”
— 건축안전연구소 책임자, 엘리엇 포터


그는 뒤이어 덧붙였다.

“그 선택이 72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4. 마르와의 일기, 그날 밤


“12시 58분. 연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내게 젖은 수건으로 입을 막으라 했고, 아빠는 계속 문을 붙잡고 있어요. 창문은 너무 뜨거워요.”

“1시 14분. 복도에서 비명이 들려요.
무서워요. 구조 헬리콥터는 오지 않아요.
불이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얗게 연기가 가득해요.”

“1시 37분. 아빠가 우리를 안고 기도하고 있어요. 이게 우리가 런던에서 찾은 삶인가요? 엄마는 울지 않으려고 해요.”

그 후의 기록은 없다.
마르와의 일기는 연기로 그을린 채, 구조대원이 발견한 서랍 속에 남아 있었다.


5. 눈앞의 경고, 반복되는 비극


그렌펠 타워는 경고를 무시당한 건축물이었다.

“화재경보가 작동하지 않는다.”
“외벽 패널의 안전성에 의문이 있다.”
“출입구는 너무 좁고, 비상계단은 하나뿐이다.”


입주자 협회는 수차례 경고문과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관리 회사와 지방정부는 응답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경고를 듣지 않았기에, 우리 이웃들이 죽었다.”
— 생존자이자 활동가, 하산 아이디


이후,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용된 외벽 자재는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화재 위험성으로 금지된 제품이었고,
이 건물에 설치된 것은 **보다 저렴한 ‘가연성 등급’**이었다.


6. 건축의 책임, 목소리를 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도시의 양극화, 규제의 무능함, 저소득층 거주민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디자인이 생명을 위협하는 시대의 경고였다.

사망자 72명.
생존자 수백 명.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런던 전체를, 나아가 전 세계 고층건축계에 경종을 울렸다.

그렌펠 타워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불에 탄 외벽이 철거된 자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외벽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그곳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Justice for Grenfell.”
“우리는 죽지 않았어야 했다.”


7. 그리고 다시 묻는다

“건축이 생명을 품는다면, 그 책임도 함께 품어야 한다.”
— 건축가 마야 데일리


그렌펠 타워는 말이 없다.
그러나 타버린 그 뼈대는,
밤하늘에 대고 여전히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안전한 집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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