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웨이스트 비누 시리즈_01
부담이 되는 일이 있으면 방치하는 게 습관이다. 큰 일은 그렇지 않지만 비교적 작은 일에는.
그중 하나가 샴푸통 그리고 린스 통. 다 쓰고 남은 용기는 몇 달 욕실에서 굴러다닌다. 그때 그때 싹싹 치우지 않고 못 배기는 성격 절대 아니라는 거. 이런 거 잘 참는다. 움직이는 곳에 흔적을 남기는 게 나름 아이덴티티 중 하나다. 동거인이 가끔 불평을 하지만 이런 거 또 못 들은냥 그냥 지낼 수 있다는 거. 뭐 이런 인간이 있어!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알맹이만 쏙 뽑아 쓰고 남은 플라스틱 통을 이제 나랑 상관없는 것이라는 듯 그냥 밖에 내놓는다는 게, 그러면서 재활용되겠지 바라고만 있는 게, 그게 그냥 마음에 걸리는 거다. 그래서 별 뾰족한 수 없이 좀 더 오래 갖고 있다, ‘집안이 너무 더러워’ 하며 ‘다 치워버려야지’라고 마음이 동할 때까지 잠깐 더 갖고 있는다.
한살림 크림형 린스 마지막 쬐끔 남은 걸 다 써보겠다고 쥐어짜다 엄지 손가락의 고통을 느끼며, 린스바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로 웨이스트 단체 카톡방을 눈팅하며 호기심을 갖고 있더 터라. 이제 기회가 왔네, 써 볼 기회가. 풀풀 거리는 머리카락을 진정시키느라 한 달에 한 통 꼴로 린스 통을 버리다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됨.
나름 비누 성애자라 이것저것 사서 써볼 생각에 잔뜩 흥분해서 검색을 했다. 린스바 또는 컨디셔너바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러쉬를 제외하고 린스바가 나오는 브랜드는 여섯 개 정도. 그마저도 브랜드 별로 한 종류의 린스바를 만든다. 이 중 다섯 가지 제품을 사용해봤고, 그중 하나는 이제 생산 중단되어 현재 구입 가능한 네 가지 제품을 소개한다.
₩12,800 / 70g 바로가기
비누포장 : 종이팩(비닐팩으로 보이나 종이로 분리배출 가능) / 배송포장 : 골판지박스, 비닐테이프, 크래프트 봉투
천연비누 전문 브랜드 이즈솝 제품.
동그랗고 한 줌에 쥐어지는 귀여운 모양이 인상적이다. 달짝지근한 레몬, 오렌지 향이 샴푸 후 살짝 꼴꼴한 향을 남긴다. 소개하는 네 개의 제품 중 가장 무거운 느낌. 발림이 뻑뻑한 편이라 발린 건지 아닌 건지 구분이 잘 안되지만 헹구고 나면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꽤 오일리 하니 바른 듯 안 바른 듯 살짝 바르고 잘 헹궈 줄 필요가 있다. 건성인 사람에게 적당해 보임.
₩10,000 / 80g / pH 5.5 바로가기
비누포장 : 종이상자, 비닐 / 배송포장 : 골판지박스, 종이테이프, 갱지(완충재)
자연주의 안전한 성분의 화장품을 만드는 브랜드 네츄럴 팁스 제품.
써 본 것 중에 만족도가 가장 높다. 김작과 주파티셰도 가장 선호하는 린스바. 사용 후 머릿결에 영양이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향은 라벤더 향으로 고급짐. 건조 후에는 향이 남지 않지만 머리 감을 때 기분은 좋다. 쓰다 보면 다시마 가루가 한 면에 올라오지만 쓰는 데는 이상 없어 보임. 모발 타입에 관계없이 추천한다.
머리를 감고 젖은 상태에서 모발 끝 부분에 린스바를 바른다. 잠시 포즈. 이후 물로 헹궈준다. 충분히 잘 헹궈준다. 안 그러면 떡진 머리로 하루를 보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겁을 먹진 마시길. 안쪽 머리카락까지 잘 헹궈주면 말린 후 부드럽고 찰랑거리는 상태가 됨. 물론 제품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상태에 따라 농도 조절해주면 된다.
₩9,500 / 100g / pH 5.5 바로가기
비누포장 : 종이상자 / 배송포장 : 골판지박스, 비닐테이프, 옥수수 전분 완충재
발달장애인이 비누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착한 기업 동구밭 제품.
시원한 민트향이 강하게 나서 화장실 방향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위 두 제품과 달리 젖은 머리카락에 바를 때 살짝 거품이 일어 발림이 상당히 부드럽다. 단, 욕실 바닥에 흥건해진 오일에 미끄러짐 주의! 머리 감는 중에 샴푸 후 뻑뻑함을 잡아주어 사용감이 좋지만, 말린 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반전이. 여전히 머릿결은 풀풀~
₩15,000 / 100g / pH 5.5~6.5 바로가기
비누포장 : 종이상자 / 배송포장 : 크래프트 박스, 지아미(완충재)
동물성 원료를 배제한 안전한 화장품을 만드는 더비건글로우 제품.
상큼한 자몽향이 진하게 난다. 샴푸 후 건조 상태에서 향이 남는 건 이 린스바 하나뿐. 향긋한 머릿결을 흩날리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 발림성 좋고 머릿결에 묵직하게 남지 않기 때문에 린스바 입문자가 쉽게 사용하기 좋다.
린스바를 써보면서 놀랐던 건, 생각보다 린스바가 쉽게 줄지 않는다는 것. 한 번 쓸 때 1g 남짓 쓰게 된다. 80g을 기준으로 하면 세 달 정도 쓸 수 있으니 액상 컨디셔너 보다 경제적이다. 관리에 대해 걱정을 했는데 쉽게 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참에 앞으로 계속 린스바를 쓰려고 한다. 사용 후 만족도가 꽤 높다. 화학물질이 들어가지 않은 천연 성분이라 좋고, 머릿결이 더 건강해진 느낌이다. 물론 머리카락 상태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쓰고 난 후에 머리카락이 두툼하게 차오르고 부드러워진다. 극건성인 김작의 경우 린스바 하나로 충분하지는 않다고 한다. 오일을 덧 발라야 한다고. 중건성이고 가는 머리카락이 부스스 엉키는 나한테는 적당하다.
무엇보다 거대한 플라스틱 컨디셔너 통을 남기지 않는다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