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랗지만 자원을 아낀 2021 달력
여기가 어디쯤이지.
모르는 곳을 갈 땐 수백 번도 더 지도 어플을 확인한다. 한 달 데이터 사용량이 죄다 지도 어플일 때도 많다. 길을 잘 가다가도 한번 돌아서면 어느 방향으로 걷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길치니까. 길치라기보다는 방향치라고 해야 하나. 이런 유형에게는 길을 알려주기도 어렵다. '그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가.' 그 앞? 그게 그 건물을 보고 있는 방향인가, 등지고 있는 방향인가? 아, 그전에 그 앞은 정문 기준인가?
이런 답 없는 길치는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 고행을 수없이 겪고 '지도를 잘 보는 길치'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잘 찾기도 하고, 계속해서 지도를 잘 보기도 한다. 자칫하면 지하철과 버스를 반대로 타고 계획되지 않은 강제 서울여행을 떠날 수도 있으니까.
이런 길치가 어느 날부터인가 날짜 감각을 잃기 시작했다. 하나의 인간이 보유할 수 있는 능력에는 정량이 있는 걸까. 마치 다리를 얻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오늘이 며칠인지는 고사하고 내가 이번 달 어디쯤 있는지도 잊게 되었다. 그러다 내릴 정거장을 지나친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란다. 기사님, 세워주세요. 벌써 12월 말 일리가 없어요.
달아나는 날짜 감각을 붙잡기 위해 현관문 중앙에 떡 하니 커다란 달력을 붙여놨다. 지금이 어디쯤인지 잘 보고 내릴 수 있게. 이 방법은 꾀나 잘 통했다. 집을 나설 때마다 날짜를 확인하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해본 후 내릴 채비를 한다.
다가오는 2021년에도 이 방법을 써먹어 볼 생각이다. 달력은 수명이 정해진 물건이니만큼 버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분리하기도 어렵고 재활용이 될 확률이 아주 낮은 스프링이 없으며, 커다랗지만 최대한 자원을 아낀 그런 달력을 몇 가지 찾아봤다.
우리나라 재생종이 / 중철
170x240mm (B5 size) / 19,000원 (해피빈 펀딩 :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특별호 중 1권 포함 구성)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생태환경 문화잡지의 이름이며 곧 회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창간호를 재생종이로 펴내며 시작한 곳으로 15년 전부터 매년 재생종이로 달력을 만들어 왔다. 우리나라 폐지로 만든 재생종이로 만든 달력 안에는 우리말 열두 달 이름, 24절기 일력과 함께 환경기념일이 담겨있다. 푸른 청록색 휴일과 함께 꼬박꼬박 들어찬 환경의 날들을 챙겨보는 것도 좋다. 쬐끄만 행동들로 숲을 살리는 365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설사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해도 다시 1월 1일이 돌아왔을 때 달력 스테이플러 심들을 쏙쏙 빼서 종이로 분리배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arth pact 얼스팩 사탕수수 종이 / 고무나무 프레임
세로형 257x364mm (B4 size) / 가로형 380x280mm / 14,800원
얼스팩의 종이는 사탕수수의 부산물로 만들어 따땃한 색을 지니고 있다. 그래선지 원고지 분위기와 찰떡이다.
원고지의 줄 간격은 한 줄로 주욱 그어 긴 일정을 표시하거나, 한 칸씩 채워나가며 새로운 습관 만들기를 할 수도 있겠다. 이런 포근한 갬성에는 많은 글자보단 간단한 표시가 제격이다. 고무나무로 제본을 하여 달력의 상단을 꽉 잡아 고정했고 어디든 걸기 좋게 끈이 달려있다. 1년 내내 방안을 우디한 분위기로 채워줄 테지만 1년짜리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포스터 걸이라거나 다른 역할의 쓰임새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백아이보리 : FSC 삼림인증 친환경 종이, 내추럴 : 사탕수수 종이 / 낱장 (두 가지 집게 포함)
297x420mm (A3 size) / 15,000원
크기부터 아주 맘에 든다. 폰트도 눈에 쾅하고 박힐 만큼 대문짝스럽다. 색상이 두 가지인 줄 알았더니 종이 자체가 다르다. 원하는 느낌과 추구하는 바로 종이를 고를 수 있다. 제본 없이 낱장으로 되어있어 나처럼 자석으로 문에 붙이거나 마스킹테이프로 벽에 붙이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물론 열두 달 전부를 벽에 걸 수 있도록 집게를 준다. 그것도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구멍 크기가 다른 두 개 다 준비했다.
하루의 칸마다 작은 줄 노트가 있어 중요한 일정이나 해야 할 잡다한 일들은 물론, 오늘은 무얼 먹었는데 그 식당은 이제 탈락이며, 날씨가 반차 쓰기 좋고, 기분은 이랬다가 저랬다. 등의 짧은 일기를 적기에도 넉넉하다.
재생종이 / 낱장
183x255mm / 7,020원 (10% 할인 중)
사진작가 정연화의 사진이 담긴 공장의 느린계절 달력. 느린 사람이 아름다운 계절을 기억하기 위한 언어로 사진을 기록했다고 한다. 각 달의 사진은 스치듯이 보아도 그 달과 어울리는 계절의 풍경이다.
좋아하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다. '당연한 거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당연하게 하늘색이라고 부르던 하늘색을 보기 어려웠던 지독한 장마를 겪은 올해 여름처럼. 당연한 건 점점 사라진다. 달력 속의 사진도 언제까지 당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인지 지난 달력은 사진대로 오려 엽서로 재사용할 수 있게 뒷면에 점선이 인쇄되어있다.
재생펄프(PCF) 50% + 비목재 펄프(대나무/사탕수수) / 실(면) 제본
S : 140x210mm (a5 size) 7,000원 / M : 185x260mm (b5 size) 8,000원
올해 달력은 없나... 하고 지구나무를 수십 번 들락거리고 발견했다. 작년에는 100% 재생펄프지였고 올해는 그것의 절반에 비목재 펄프를 더했다. 덕분에 티끌이 더욱 다채롭다. 두 가지 크기의 달력은 똑같이 검은 콩기름 인쇄했고 실로 박음질해 마감했다. 박음질 아래로는 칼선이 있어 쉽게 지난 달력을 뜯을 수 있어 하나의 구멍으로 벽에 걸기도, 낱장으로 붙이기도 좋다. 무엇보다 패키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 박수 짝짝짝. 옵션으로 패키지 '프리' 또는 500원 추가 시 '종이봉투+스티커'로 포장 가능하다. 세상 모든 포장은 공짜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다. 이렇게 선택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