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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택지 Jan 11. 2021

버려도 되는 가구

종이가구 페이퍼팝

나의 넷플릭스 최애 드라마는 '종이의 집'이다. 그리고 나는 폰으로 저녁마다 홈 스타일링을 구경한다. 명석한 유튜브 알고리즘은 그렇게 나에게 종이의 집 컨셉 집 꾸미기 영상을 제안했다. 드라마 종이의 집 내용과는 무관할 걸 뻔히 알고 있었으나 종이의 집 시그너쳐 의상과 가면을 쓴 썸네일이 열일했다. 


영상의 내용은 종이로 된 가구로 집을 채우는 것. 종이로 만드는 가구야 과제의 늪에 빠져있던 시절 핀터레스트로 지겹게 봐왔던 거지만 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판매를 하는 가구라니. 그것도 침대까지 있다니.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서 뛰어다녀도 멀쩡하기까지 하다니.


영상 속 종이가구 브랜드 페이퍼팝은 쉽게 버려지는 가구를 종이 가구로 대신하자는 솔루션을 제안한다. '버려질 것을 대비해 버려도 되는 것으로 대체한다.' 가구 폐기물은 그냥 버려지지만 종이는 적어도 50%는 재활용이 되니까. 무엇이든 쉽게 버리고 사는 인식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결코 친환경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페이퍼팝의 가구는 1인 가구를 타깃으로 한다. 정확하게는 한 원룸에서 계약기간만큼만 사는 1인 가구일 것이다. 이들은 회사와 가까운 곳, 조용한 곳 등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를 다닌다. 하지만 원룸에서 원룸으로의 이사에는 온갖 변수가 도사린다. 


원룸은 같은 평수, 같은 구조라도 1cm 크기 차이가 가구 배치는 물론이고 가구의 소유 여부까지 결정하기도 한다. 당장에 가지고 있던 가구가 방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쓰다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을 사는데 이른다. 원룸의 계약기간은 가구 사용기간을 포함한 셈이다. 


당근마켓이 이런 물건들의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기도 하지만 당근에 올린다고 다 팔리는 건 아니다. 가구는 용달 장벽도 있고- 이렇게 재사용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재활용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면 한번 골라볼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사선물을 받았다. 페이퍼팝의 보야지 트렁크... 의 조립 전 상태를. 

웬만한 가구 조립은 전부 해본 마스터라 자연스럽게 목장갑을 끼고 박스를 개봉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설명서를 딱 노려보는데... 어라? 크기에 비해 조립이 너무나도 간단하다. 박스를 개봉하는 것부터 15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목장갑이 사치 수준이다. 



그렇다고 종이접기 하듯 허술하지도 않다. 자석 잠금장치를 나름 볼트와 너트로 고정하도록 되어 있고 종이를 끼우는 홈도 꾀나 견고하다. 처음에는 조금은 못 미더워 세게 누르면 자국이 날까 조심조심 다루었지만 우당탕탕 조립을 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내가 이 보야지 트렁크를 선택한 이유는 침대 옆 30cm 틈에 들어갈 협탁이 필요했음이다. 하지만 one source, multi use의 시대가 아닌가. 하나의 가구가 한 가지 역할만을 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일 큰 사이즈, 98cm를 고르기도 했고 말이다.



우선 스툴이다.

이 트렁크는 자동차 엔진블록 패키지에 쓰이는 종이로 만들어 성인 2인이 올라가도 거뜬히 버틴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상품설명을 다 믿어요. 잔뜩 쫄아서 조심조심 앉아봤는데 오- 우선 나 하나 앉는 건 아주 안정적이다. 2인은 언젠가... 실험해보겠다.


이번엔 고대로 눕혀 좌식 테이블.

1인 가구답게 의자가 한 개인 집이라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입식 테이블에 둘러앉을 수가 없더라. 접이식 밥상은 쪼끄매서 음식이 다 올라가지도 않는다. 비록 5인 이상 모일 수 없는 시국이지만 근미래에는 5인분 식기도 거뜬히 올라가는 넉넉한 테이블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수납.

보통 박스, 벤치 형태 수납장은 윗면이 열린다. 자주 쓰지 않거나 계절이 지난 옷들을 보관한다 해도, 어쩌다 안쪽 물건을 꺼낼 때면 위에 올려둔 물건들을 모조리 치워야 한다. 만약 위로 박스를 차곡차곡 쌓았다면 노동이 따로 없다. 

하지만 보야지 트렁크는 수납장이 앞으로 열린다. 그 덕에 안쪽 수납도 한눈에 보인다. 거기다 생각보다 내부가 넉넉해 크기가 제각각인 책과 잡지들도 문제없이 들어간다. 옷도 넣어봤더니 두꺼운 겨울 스웻셔츠, 니트. 바지들이 20벌은 족히 들어간다. 참고로 한 칸에 두루마기 휴지 12개씩 들어가더라. 크기만큼 수납력이 짱짱하다.


마지막으로 협탁으로 사용하려던 이 트렁크는 재택근무 중인 나의 책상 아래 발받침이 돼주고 있다. 두 다리 뻗고 앉아있으면 을매나 좋게요.


사실 나는 종이박스 가구 유경험자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하지만 얼핏 6년 전에도 있었던 종이박스가 아직도 멀쩡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코팅도 없고 그리 두껍지도 않은 재질인데 생각해보니 대단하네. 그러니 튼튼한 이 녀석은 평생 가구까진 아니더라도 꽤 오랜 시간 거뜬히 같이 해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p.s. 종이박스에 바선생이 서식한다는 말이 있긴 하나 아직 한 번도 출몰한 적은 없다. 그랬다면 나는 종이박스는 물론 집을 버렸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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