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칫솔, 험블 브러쉬와 닥터 노아
미대생 시절, 과제 중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고 일회용 칫솔로 샹들리에를 만든 적이 있다.
손잡이 끝에 구멍이 나있으면서 불투명한 하얀색 칫솔이라는 조건을 걸고 나니 재료 수급부터 어려웠다. 결국 모텔 비품 전문 쇼핑몰에서 다른 것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난한 나는 샹들리에의 지름을 줄이고 200개쯤 샀더랬다.
자, 그럼 계산해보자.
일회용 칫솔의 품질을 감안해서 2주는 썼다 치자. 나는 거의 7년 치 칫솔을 빚졌다.
그래서 나는 대나무 칫솔을 쓴다. 내가 생각하는 지속 가능한 소비란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 썼으면 어디선가 줄이면 된다. 그렇다고 7년 간 칫솔을 안 쓸 수는 없으니 알맞은 대안책을 찾은 것.
사실 대나무 칫솔 전 여러 가지 친환경 딱지가 붙은 칫솔들을 구입해봤다.
대부분 옥수수, 사탕수수 등으로 만든 바이오매스 플라스틱이거나 생분해 플라스틱이었다. 그냥 플라스틱보다는 낫겠지... 하며 사용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나무 칫솔은 비싸기도 했고 어디서 쉽게 볼 수도 없었던지라 마음의 장벽이 높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야!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면 대나무 칫솔의 사용후기가 넘쳐난다. 근 1년 사이에 대나무 칫솔을 만드는 브랜드도 많아져 선택지도 많아졌다. 제로 웨이스트 초심자를 위한 키트에선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다. 이젠 판촉용으로 나오기까지 한다.
이제는 식상할지 모르지만 보편화되진 않은 물건, 아직 내 주위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물건,
그래서 더 알려야 하는 대나무 칫솔에 대해 후기를 남겨보려 한다.
그런데 왜 대나무야?
우선 내가 알 수 없는 이과들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다.
바이오매스 플라스틱은 정확하게 뭔지, 생분해 플라스틱은 진짜 생분해가 되는 건지.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어려워서 일단 이 녀석들은 보류다.
그에 비해 대나무는 천연소재이니 생분해는 물론이며 무자비한 삼림파괴가 없다. 하루에도 30cm은 기본으로 자라 주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자라는 풀이라 지속가능성이 높은 자원으로 평가받고 있으니까-
물론 대나무 칫솔도 칫솔모는 플라스틱이다. 칫솔모까지 친환경이려면 멧돼지 털이 최고라... 이건 또 이 것대로 많은 문제가 있어 지속 가능한 칫솔모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자.
모소(moso) 대나무 + 나일론 6 칫솔모 + 재생 종이상자 + 생분해 비닐
성인용 기준 : 기본(soft) 4,900원 / 미세모 5,900원 / 바로가기
“자메이카에 자원봉사를 갔던 치과 의사 Noel Abdayem은 그곳 아이들의 구강 상태에 한 번 놀라고 플라스틱 쓰레기로 뒤덮인 해변을 보고 두 번 놀랐다. 그리고 2014년부터 그는 대나무 칫솔을 만들어 그 수익의 일부로 비영리 재단과 함께 소외계층의 구강 보건을 돌보며 사회 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라는 동화 같은 탄생 비화를 가진 험블 브러쉬.
해외 험블 브러쉬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칫솔이 소프트, 미듐, 미세모 그리고 헤드 교체형까지 있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칫솔은 soft와 미세모뿐이다. 이 중 soft는 성인용, 어린이용이 각 5가지 색상으로 나온다. 이 외에도 치실, 치간칫솔, 치클 등 많은 구강관리 제품들이 있다. (대나무 빨대까지!)
패키지는 퇴비화가 가능한 내부 포장재와 재생 종이박스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투명한 플라스틱 패키지를 대신해 실물과 거의 동일한 크기의 칫솔 사진이 프린트되어있다. 좋은 방법이다.
왠지 투박할 것 같던 대나무 칫솔은 생각 외로 가늘고 매끄러웠다. 살짝 곡선을 이루는 칫솔 머리와 가느다란 목은 얇은 두께임에도 든든하다. 그 아래 엄지를 받치는 통통한 손잡이는 부드러웠다. 양치하다 나무 가시에 찔리는 불상사는 없다.
험블 브러쉬는 대나무를 자르고 쪼개어 증기를 쏘이고, 햇빛에 널었다가 크기대로 썰어 표면을 벗기고, 구멍을 내면 머리를 둥글게 깎고, 레이저로 로고를 박고 샌딩을 한 후에야 소이빈 왁스를 바르고 칫솔모를 심어 비로소 칫솔을 완성한다. 마스터피스가 따로 없다.
난 미세모 칫솔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조금 더 값이 나가더라도 미세모를 첫 타자로 골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택 미스였다. 익히 알고 있던 미세모와 달리 애가 힘이 없다. 개인 차야 있겠지만 잇몸을 긁을까 무서워 새 칫솔을 꺼낼 때마다 몸을 사리는 김작자에게도 훌렁훌렁한 모였다.
그래서 분노의 양치질 따윈 꿈도 못 꾼다. 절대 박박 닦을 수 없게 설계된 미세모는 손쉽게 3분 양치질을 가능케 한다. 천천히 양치하게 하는 마법- 평소 칫솔을 두 개씩 두고 쓰는 나에게 이 칫솔은 아침 양치 기피대상이 되었다. '난 잇몸이 약해서 새 칫솔 쓰면 꼭 피가 난다', '난 이가탄이 생필품이다' 하는 분에게 추천하겠다.
이렇게 험블 브러쉬를 포기할 순 없어 기본(soft) 칫솔에 도전했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본 칫솔은 종이박스가 더 작다. 색상은 퍼플. 상자 그림만 보면 분홍색 같은데... 쨍한 보라색이 맞다.
딱 보기에도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미세모보다 기본(soft)은 칫솔모 끝이 뭉툭하다. 모양도 중간이 움푹 들어간 물결 형태다. 그 외에는 칫솔 머리의 끝 모양이나 두께, 모량과 모 길이의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양치를 하자마자 깨달았다. 이게 기본(standard) 이란 걸. 아, 이래서 이걸 제일 먼저 수입했구나, 싶더라. 막 엄청 부드럽진 않은데 새 칫솔임에도 아프지 않은 정도다. 그러면서 권장 사용기한인 2개월은 든든하게 버텨줄 것 같은 힘. 적어도 나에겐 딱 알맞은 경도다.
사실 험블 브러쉬 미세모를 쓰면서 모 심은 간격은 넓고 머리는 좁은 것이 좀 불편했다. 이것이 대나무 칫솔의 한계인가, 그래도 써야지 어쩌겠어... 포기할 찰나 기본(soft)을 쓰면서 그 문제는 다 해결됐다. 훌렁훌렁한 게 문제였던 것뿐. 기본을 쓰세요, 여러분!
위에도 언급했듯이 난 칫솔을 두 개씩 두고 쓴다. 욕실에 하나, 주방에 하나.
이유는 많지만 하나를 꼽자면 양치할 타이밍에 양말을 신고 물에 젖은 욕실 슬리퍼를 맞닥뜨릴까 봐...?
여러 가지 친환경 칫솔들을 경험하고 있다 보니 사용 중인 칫솔이 똑같은 것인 경우는 적다.
지금은 험블 브러쉬 그리고 닥터 노아다.
마루 대나무 칫솔 : 대나무 + PBT 미세모 + 사탕수수 종이상자 / 2,800원 바로가기
옻칠 칫솔 : 모소 대나무 + PBT 미세모 + 종이상자 / 5,200원 바로가기
닥터 노아 역시 치과의사가 해외에 갔다가 만들게 된 구강용품 브랜드이다. 그는 에티오피아에서 득템한 1달러짜리 대나무 바구니 10개가, 사실 현지 아이들이 학교도 못 가고 4-5시간 동안 만든 생계였다는 걸 알게 되면서 대나무가 그들에게 경제적인 자립을 도와줄 수 있는 자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렇게 닥터 노아는 탄생했다. 국내 대나무 칫솔 브랜드로는 제일 유명하지 않을까-
나의 처음 닥터 노아 칫솔은 '옻칠 칫솔'이었다.
대나무 칫솔을 쓰기 전 걱정했던 건 나무가 썩는 것. 습기 가득한 화장실에서 거뭇거뭇한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건 아닐까 했는데 옻칠을 했다니. 이 정도면 안심이지. 하지만 5,200원짜리 칫솔이라 손을 덜덜 떨며 결제했다.
여타 대나무 칫솔들과는 다른 진한 옻색이 맘에 든다. 오일 스테인을 먹여놓은 느낌. 이게 원목의 매력이지. 물론 대나무는 풀이지만. 일자로 쭉 뻗은 모양새와 각진 손잡이가 직선을 좋아하는 나의 맘에 쏙 들었다. 난 이런 거 굉장히 신경 쓴다. 보통 플라스틱 칫솔들의 난리 나는 알록달록 고무 파티는 꼴 보기 싫은데 이건 축복이다.
그리고 헤드가 작다. 다른 사람들의 구강 구조를 모르니 비교 대상은 없다만 이상하게 난 어금니 안쪽 공간이 비좁다. 커다란 칫솔이 들어가질 못한다. 그런 부분에선 합격이다. 하지만 대나무 칫솔이 원래 그런 건지 헤드에 비해 칫솔모가 심어져 있는 부분이 좁다. 혀를 세로로 닦는 나는 조금 답답하다. 왕타 칫솔 같이 칫솔모 뭉치가 넓고 긴 것을 좋아한다면 아주 아쉬울 듯.
옻칠 덕분인지 나무가 썩는 건 물론이고 물에 젖지도 않는다. 아무런 문제 없이 두 달가량 잘 썼다. 그리고 칫솔 교체할 시기가 되니 고민이 되더라. 더 저렴한 건 없나요...?
크- 타이밍 좋게 닥터 노아에서 리뉴얼된 마루 대나무 칫솔이 나왔다. 가격도 옻칠 칫솔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이번에 패키지가 바뀐 것인지 단상자가 사탕수수로 만든 종이였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마루 칫솔은 납작한 모양에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다. 각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올- 그립감이 너무 좋다. 무엇이든 꽉 쥐는 버릇이 있는데 둥글하니 손도 안 아프고 안정적이다. 미끌림도 없다. 리뉴얼 잘했다고 칭찬 댓글이라도 쓰러 가야겠다. 각인은 새로운 로고로 변경되어 크게 들어갔다. 이 점은 아쉽다. 로고 조금만 작게...
그런데 옻칠과 마루가 손잡이에서만 차이가 나는 게 아니다. 모가 같은 재질인데 다르다. 이게 사진으로는 표현이 어렵지만 마루 칫솔의 모가 훨씬 부드럽다. 옻칠 칫솔의 모는 끝은 미세모이지만 단단하게 잘 휘어지지 않는 느낌이라면 마루 칫솔은 스르륵 부드럽다.
이게 양치할 때 더 크게 느껴지는데 옻칠 칫솔은 내가 하나하나 집중 공략해야 하는 느낌이라면 마루 칫솔은 그 어디쯤 하고 있으면 그 주위를 알아서 돌아다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잘 퍼지니까-
양치의 올바른 방법을 따지자면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마루가 더 편했다.
결론은 김작자의 선택지는 험블 브러쉬 soft와 닥터 노아 마루 칫솔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두 브랜드 다 두 번째로 선택한 것들이 더 맘에 들었다.
그러니 여러분도 대나무 칫솔 한번 써보고 '이런 거 다신 못쓰겠다!' 하지 말고 한번 더 도전해보라. 이에 착 달라붙는 대나무 칫솔을 만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