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갑, 대나무, 밀짚으로 만든 휴지
일곱 번의 이사를 감행했음에도 나의 이삿짐 싸기 스킬은 영 늘지 않는다. 대형마트에서 박스를 구하기 어려워진 시점부터는 단프라 이사 박스까지 구비했건만 어째 박스에 들어가지 못하는 잔짐은 여전하다. 그것들은 대게 부피도 큰 주제에 이사 당일 새벽에서야 위용을 뽐낸다.
개중 제일은 휴지다. 하지만 휴지는 방법이 남아있다.
열댓 개쯤 남아있는 휴지를 들고는 이미 휴지가 걸려있는 화장실 변기 위에 하나 더 올려둔다. 주방과 방에도 하나씩. '요긴하게 잘 쓰세요.' 속으로 외며 깨끗한 새 휴지 임을 티 내기 위해 뜯지 않은 이음새가 잘 보이게끔 둔다. 얼굴은 모르지만 이 집의 시간을 나눌 사람에게 주는 집들이 선물.
그렇게 휴지 봉투가 줄어들면 어째 어째 박스에 들어간다. 휴지를 남겨두는 이사의 미덕은 떠나는 나의 짐을 완성해준다. 뭐, 짐을 줄일 목적은 아니더라도 난 꼭 하나씩 새 휴지를 걸어놓는다. 그리고 다음번 이사 때는 오늘 소개할 휴지를 남겨두고 가려한다.
이사 가는 집에서 아래의 휴지들이 발견된다면 김작자의 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깨끗하게 닦은 자리에 올려둘 테니 환경에 좋은 휴지들 한 번씩 써보세요.
우유갑 재생지 + 비닐포장 / 택배 : 비닐포장
40m 18 롤 13,000원대 바로가기
재생펄프는 추가로 형광증백제를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재료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 그 가능성을 없애면 되지. 100% 우유갑으로 만들어서 말이다. 우유갑은 본디 식품용기로 기준이 까다롭다. 그래서 고오급 펄프로만 만들어진다. 휴지로 다시 태어나기 제격이다. 우유만큼이나 뽀얀 우유갑은 형광증백제도, 새로운 나무도 필요 없으니까-
코주부 두루마리 휴지(18롤)는 30년생 나무 12분의 1그루를 보존할 수 있다는 뜻의 이름을 가졌다. 휴지를 사용하면서 아낄 수 있는 나무의 양이 뚜렷하게 보이니 뿌듯한 한편 내가 30년생 나무 밑동을 베어다가 쓰고 있었구나 싶어 화장실에 앉아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휴지에 대한 감상을 말해보자면 여느 휴지들과 똑같다. 내가 써오던 휴지와 별 다를 바가 없어 오히려 리뷰를 남기기 멋쩍을 정도. 재생이라고 해서 단점도 그렇다고 특별한 점도 없는 무난템. 이름은 다르지만 한살림 매장에서도 우유갑 재생휴지를 구매할 수 있으니 택배 쓰레기 없는 이 휴지에 정착하려 한다. 휴지에 관해 확고한 철학과 조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두루두루 다 추천한다.
아, 한살림의 우유갑 휴지도 이 1/12그루 휴지도 모두 국내 최초로 우유갑 재생 휴지를 개발한 '부림제지'에서 만들었다. 주민센터에서 우유갑을 1kg 모아 오면 휴지 한 롤과 교환해준다는 캠페인, 그 주인공도 이곳이고 말이다. 사실 우유갑 1kg로는 휴지 한 롤 만들기도 부족하다. 손해를 보고라도 우유갑 재활용을 홍보하는 셈.
휴지로 재생할 우유갑은 국내에서 모두 수급이 안된다. 우유갑 생산량에 비해 수거되는 양은 턱없이 적다. 대부분 해외에서 값을 더 주고 들여온다고- 더욱 분리수거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결심해볼 대목이지만 우유갑 1kg 모으기는 나같이 우유를 잘 안 먹는 사람에겐 어려운 과제일 테다. (1kg면 1000ml 우유갑 30개다.)
이럴 땐 '오늘의 분리수거'라는 앱을 통해 가까운 IOT 우유팩 수거함을 찾아 분리 배출하거나 한살림 매장에 설치된 우유갑 수거함에 가져다주자. 조합원 가입이 되어있다면 포인트도 적립해준다. (종이팩은 깨끗하게 씻어 잘라 펼친 다음 바짝 말린 후 배출하기!)
택배 없이 구매하고 싶다면
1. 제로 웨이스트 샵 찾기 알맹지도
: 가까운 제로 웨이스트 샵에서 우유갑 재생휴지를 판매하는지 문의 후 방문하기
2. 한살림 매장
: 한살림에서는 '숲사랑 휴지'라는 제품명으로 판매되고 있다.
대나무 펄프 + 비닐포장 / 택배 : 비닐포장
30m 30 롤 19,800원 바로가기
세상에 사연 없는 휴지 없다고 이 휴지의 이름에도 뜻이 담겨있다. 펄프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30년생 나무가 20그루나 필요하다. 하지만 대신 대나무 휴지를 쓴다면 우리나라에 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효과라는 것. 그래서 뱀부 500이다 이 말이야.
뭐, 물론 이 속에 들어간 계산식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나무가 지속 가능한 소재로, 나무를 대체하고 삼림을 보존할 수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칫솔부터 휴지까지, 욕실에 지대한 임무를 맡고 있는 고마운 자원이다.
색상은 딱 버버리 트렌치코트 색. 하얀색이 아니라 엠보싱이 많이 들어가 있어 다른 제품보다 푹신하다. 먼지 날림도 없고 부드럽다. 사실 사용감만 따지자면 뱀부 500을 꼽겠다. 물 흡수도 빠르다. 그런데 이게 흡수된 게 사방으로 퍼져... 화장실을 다녀오면 꼭 손을 씻읍시다.
아쉬운 점은 딱 30롤짜리만 나오기 때문에 집에 휴지를 쟁여놓을 공간이 부족하다면 방구석 한자리 차지할 녀석. 1인 가구로 휴지를 소진하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 욕실 서랍, 침대 서랍, 냉장고 위 등 곳곳에 포진한 휴지를 줄이기 힘들다. 물론 대량으로 구입해야 하는 다인 가정에서는 3개까지는 합배송이 가능하다니 참고하세요.
온라인에 판매처가 많아 포장이 다를 수도 있으나 공식 네이버 스토어에서 구입했을 때는 포장 위에 큰 비닐을 덧씌워왔다. 큰 휴지 봉투가 또 생기는 게 싫어 오프라인 판매처를 찾고 싶었으나 아직 입점된 곳은 없다고 한다.
대신 아이쿱 자연드림에서 판매하는 자연 본색의 대나무 휴지가 있다. 사용감이 같을지는 모르겠으나 택배 쓰레기가 싫다면 도전해보자. 여기는 티슈와 키친타월도 나온다.
밀짚 펄프 + 비닐포장 / 택배 : 종이상자 (12 롤의 경우)
31m 10 롤 13,900원 / 33m 12 롤 17,900원 / 24m 30 롤 24,900원 바로가기
밀을 수확한 후 남은 밀짚은 대부분 버려지거나 이산화탄소를 대량 방출하며 태워진다. 바스틀리는 이런 밀짚들로 휴지를 만든다. 밀짚은 유기농으로 재배되는 밀밭에서 거둬들인다니 안심이다. 게다가 사용 후 45일 이내에 생분해되어 퇴비화가 가능하다는 것. 오- 서울에는 집도 땅도 없으므로 화분에라도 넣어보고 실험해보겠다.
바스틀리 휴지의 색상은 뱀부 500과 비슷하다. 그런데 느낌은 정말 다르다. 엠보싱 없이 매끈매끈한 감촉에 질기다. (현재는 엠보싱이 있는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 질김은 지푸라기 섬유질에서 오는 것인지 일정한 방향으로만 찢긴다. 덕분에 물 묻은 손으로 풀어도 뚝뚝 끊길 일은 없다.
유일하게 포장은 박스에 담겨서 왔는데 12롤짜리라 가능했을 수도. 특이한 점은 포장지 옆에 안경 닦기 좋다고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는 것. 그 문구에 같이 있던 안경잡이들 모두 안경을 벗어 재끼고 닦아봤다. 와, 이거 물건이다. 처음 렌즈를 끼고 밖을 나갔을 때의 느낌. 사실 부드럽다고는 못할 감촉이라 화장실용으로는 힘들겠다 싶었는데, 밀짚은 키친타월이다. 안 써봐도 벌써 믿음이 가는 기름 흡수력.
바스틀리는 휴지의 개수가 다양하게 나오고 키친타월, 티슈, 리필용도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 또한 오프라인 판매처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으니 가깝다면 택배 쓰레기 없이 구입 가능하다. 아쉽게도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되어있지만...
참고로 국내 제품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밀짚 펄프 가공기술을 중국 업체에서 국제특허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래도 바스틀리가 그곳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