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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택지 Feb 24. 2021

아-아- 국산 밀랍초가 왔어요!

내가 보려고 만든, 초 살 때 기억할 것들

나의 본가는 삼면이 창이다. 덕분에 늘 직사광선을 쬐며 자란 나는 독립해서는 오히려 채광이 없는 집을 찾았다. 오후 4시에 해가 드는 남서향의 집이 아니라면 대부분 암막으로 집을 두르는 게 일 순위. 햇빛은 눈이 부시단 말이에요.


암막을 쳤을 때 문제는 냄새가 안 빠지는 것이다. 집에 들어올 때는 물론이고 방을 오가며 문을 열 때마다 기분이 팍 상한다. 몰랐는데 창문의 역할은 환기보단 채광이었다. 자외선은 냄새를 태운다. 대신 냄새를 날려 보내줄 놈들로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페브리즈, 디퓨저, 샤쉐... 역시 발향으론 택도 없다. 그리고 난 발화를 택했다. 모조리 태워 없애주마.


발화 중 제일은 초. 인센스나 스머지 스틱도 태우는 것들이지만 역시 향은 불맛이지. 화르륵 심지에 붙은 불꽃은 냄새를 즉각적으로 소멸시켜줄 것만 같다. 매일매일 냄새 화형식을 하다 보니 초가 다 떨어져 간다. 그제야 깨달았다. 와, 나 한 번도 초를 직접 사본 적 없구나. 무난한 선물 베스트인 초답게 항상 선물로 받아왔더라. 


그래서 마치 유튜브 썸네일 문구 같은 '초 살 때 이것만 기억하세요' 리스트 만들어봤다.


paraffin 파라핀 왁스

파라핀은 석유의 부산물이다. 2009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연구에 따르면 파라핀 초는 태울 때 톨루엔, 벤젠 같은 독성가스를 배출한다. 하지만 파라핀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파라핀에 대한 연구는 계속해서 안전기준에 합당하다는 결과를 제시한다. 아직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 이 말이다. 이렇게 애매할 때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 우리는 석유가 지속 가능한 자원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palm wax 팜 왁스

기름야자나무에서 추출되는 팜유, 그리고 팜왁스. 이것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생산된다. 기이한 건 기름야자나무가 본래 이 나라들이 원산지가 아니라는 것. 동물성 지방의 대안으로 팜유는 식품산업의 주목을 받았고 그것을 대량 생산할 곳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경제적 성장을 원했던 두 나라를 만나 같이 열대림을 태우고 기름야자나무를 심었다. 생물 다양성은 사라지고 멸종위기 동물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그 자리는 노동착취를 당하는 원주민과 아이들이 채웠다.


물론 기름야자나무는 다른 식물성 기름 작물에 비해 면적 대비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으며 한 나무당 25년간 열매를 맺기 때문에 효율적인 자원이다. 개발 도상국의 빈곤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사회적 이점도 있다. 그렇다면 팜유를 얻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윤리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판단하는 RSPO인증을 참고하자. 홈페이지에서 가입된 기업들을 검색할 수 있다.


soy wax 소이 왁스

파라핀 초가 좋지 않다는 기사가 퍼지면서 소이 왁스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돈만 된다 하면 산 하나쯤은 손쉽게 밀어버린다. 밀어 버린 땅에는 제초제에 내성을 가지도록 유전자 변형된(GMO) 대두를 심는다. 냅다 밭에 제초제를 뿌려도 잡초만 죽는다. 제초제에 강한 대두는 가축의 사료가 되거나 기름이 된다. 그 기름을 표백하고 탈취하면 소이 왁스 완성! 


그래서 소이 왁스에는 유기농이 없다. 대두가 유기농이라 한들 화학공정을 거쳐 기름을 왁스로 만드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NON GMO 소이 왁스인지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다.


beeswax 밀랍

밀랍은 일벌들이 벌집을 만들면서 배출하는 분비물이자 건축자재다. 그렇다고 벌똥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벌들은 똥을 집 밖에다 싼다. 밀랍은 끓는 물에 꿀을 다 채취한 벌집을 녹인 후 체나 면보에 걸러내는 정제 과정을 거치고 식히면 완성된다. 


물론 이 밀랍을 배출한 벌들이 어느 꽃밭에 가서 꿀을 들고 왔냐는 직접 키우는 양봉인도 장담 못한다. 그럼에도 유기농 꿀과 밀랍은 존재한다. 유기농 양봉은 오염 및 오염 우려가 있는 지역 반경 3km 안에는 벌통을 놓지 않는다. 이 벌통은 꼭 목재여야 한다. 상시 벌들에게 유기농 꿀과 꽃가루를 지급하고, 합성 병해충 기피제를 뿌리지 않으며 농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야 국내 유기농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초 하나 사겠다고 온갖 칼럼과 뉴스를 구글 번역기로 돌리다가 내가 돌아버리겠다. 사실 여기다 첨가되는 향에 대해 이야기 시작하면 문제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상황 속에 김작자는 고심 끝에 밀랍을 선택했다. 왜냐고?

밀랍 빼고 전부 수입이다. 밀랍은 국산이 존재한다. 탄소발자국! 됐다. 난 이걸로 만족한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향이 안 들어가도 꿀 냄새가 난다.

용기 없는 초가 많다. 초는 아까울만치 빠르게 녹아 사라지다가도 끝자락이 되면 용기 밑에 쬐끔씩 남는다. 분리배출하기 귀찮으니 용기는 사라져 주세요.


초 용기 분리배출 방법

따끈한 물에 중탕하거나 드라이기로 녹여서 휴지로 말끔히 닦아낸다. 심지가 곧게 서있도록 하는 심지 탭과 스티커를 떼고 분리수거한다.


프리다 밀랍초  명상초

국내산 100% 천연 밀랍 + 100% 면 심지

포장 : 종이봉투 + 설명서 + 클립

택배 : 종이상자 + 종이 완충재

지름 3.5cm x 높이 7.5cm / 5,000원 / 바로가기


프리다 밀랍초는 벌집 이외에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은 100% 천연 밀랍으로 만들어진다. 밀랍의 정제도 기계가 아닌 직접 끓이고 손수 걸러낸다고- 비닐포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종이 포장지를 사용하며 접착제 없이 클립으로만 봉해온 것이 만족스럽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여러 개의 초를 구입해도 최소의 포장으로 보내주는 '담아드립니다.' 코너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프리다 밀랍초

녹인 밀랍에 심지를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한 담금초를 구매할까 하다가 촛대도 없고 요 제품 이미지에 반해 '명상초'를 골랐다. 명상과 집중이 필요할 때 하나씩 사용하기 부담 없는 크기로 어디든 올려두기 좋다. 

밀랍초는 건조하는 과정에서 마치 곶감같이 자연스럽게 분진이 생긴다. 손으로만 슥슥 문질러 줘도 노란 빛깔을 드러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쬐끄만 게 밀랍 향은 찐-하다. 괜히 태우기 아까워서 코를 박고 킁카킁카 향만 맡고 있었다. 


어떤 초가 더욱 지속 가능하냐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자료 더미에서 벗어날 오늘 저녁, 이 초를 태워야겠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해... 

 

달달해  펜타곤 밀랍 캔들 향초

국내산 100% 천연 밀랍 + 면 심지

포장 : 지퍼백

택배 : 종이상자 + 비닐 완충재

지름 6.5cm x 높이 14cm / 8,900원 / 바로가기


여기저기 밀랍초 파는 곳 없나 돌아보다 발견한 곳. 무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양봉장에서 만들어진 밀랍초. 양봉장을 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까지 걸었다. 

+ 지퍼백과 비닐포장을 빼고 종이에 한번 말아서 보내주실 수 있냐고 문의한 결과, 요청사항에 적어주시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만듦새는 전문적으로 초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조금 아쉽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밀랍초를 만날 수 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밀랍초가 있었지만 왠지 소묘했던 기억으로 친근한 오각뿔을 골랐다. 잘못 그리면 한쪽면이 들려 보이는 거 미술학원 다니신 분들 뭔 줄 알죠?


개인적으로 초를 태울 때 항상 겉을 싹 남기고 안쪽으로만 타들어가는 터널링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한번 생기면 드라이기로 녹이거나 기본 3시간은 태워줘야 한다. 하지만 용기가 없는 초는 오히려 이 터널링이 장점이다. 초가 곧 용기. 그래도 밑받침은 해주자. 혹여 받침에 밀랍이 붙었다면 냉동실에 넣으면 된다. 밀랍은 낮은 온도에서 수축하는데 그때 막대로 툭툭 밀어주면 쉽게 뜯을 수 있다. 


밀랍은 정제 과정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나온다. 아무래도 천연물질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 그래서 두 가지 모두 빛깔도, 투명도도 다르다. (참고로 프리다의 명상초는 분진을 닦아내지 않은 모습이다.) 


향은 프리다 밀랍초가 더 진하긴 하지만 그것 또한 어떤 꽃의 꿀과 꽃가루를 들고 나른 꿀벌의 집이냐에 따라 다를 테다. 향이 연한 꽃들을 좋아했구나, 용케도 찾아다녔네... 하고 꿀벌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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