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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택지 Mar 19. 2021

여기, 세제 하나 리필이요

집순이 세제리필샵도전기

세상엔 내가 원치 않아도 꼭 따라붙는 것이 있다. 마치 회원가입 시 필수 동의 사항처럼.

세제 용기가 그렇다. "세제 구입 시 매번 새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것에 동의합니까?"라는 항목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세제를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기에는 법률까지 가세한다. 현행법 상 세제는 생활화학제품으로 인체에 직접 닿는 '화학물질'로 분류된다. 그리하여 내용물은 물론이고 용기까지 규정이 빡빡하다. 아무 용기에나 담아선 안된단 소리다.


그러나 세월과 시대의 흐름은 피할 수 없는 법.

세월이 흘러 "용기 내"는 시대가 되어 전국 곳곳 세제 리필샵이 생겼다. 그리고 이마트에까지 세제 리필 판매대 '에코 리필 스테이션'이 생기는 시대. 올- 대견하다 싶어 찾아보니 이마트 리필 스테이션은 정부가 세제 리필에 대한 규정을 갖추기 위해 시범사업으로 도입했단다. 곧 텀블러에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듯 법적으로도 당당하게 화학물질 세탁세제를 "용기 내" 담아올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담 이 흐름에 빠질 수 없지. 당신, 알맹지도에서 가까운 세제 리필 샵을 찾아보고 도전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동네 가까운 곳에 제로 웨이스트샵이자 세제 리필샵을 운영하는 '송포어스' 가 있다. 집 밖을 나가는 데에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집순이에게 도보 10분 거리라니, 이건 행운이다.

자, 방문할 곳을 정했다면 먼저 용기를 준비해야 한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입구를 가진 것을 추천하다. 생수병처럼 입구가 좁은 건 세척이 어렵다. 아니라면 기존에 쓰던 세탁 세제통도 좋다. 세제에 세제 섞는 거에 거리낌이 없다면 말이다. 참고로 이런 유리병은 경험상 발걸음을 무겁게 할 수 있다... 가벼운 것이 좋다.  


나는 아까워서 주워놓은 파스타 용기를 알코올로 닦아 들고 갔다. 리필샵 대부분 알코올 소독제를 구비해놓고 있으니 그냥 가져가도 무방하다. 마땅한 용기가 없다면 대여도 가능하니 고민 말고 언제든 방문해보자.
 

@알맹상점


세제 리필샵은 밸브가 달린 커다란 벌크통에 각종 세제를 담아 g단위로 판매한다. 세제 한 통이 아닌 1g 이라니, 행동이 달라지니 단위도 달라진다. 우선 가져간 용기의 무게를 재 저울의 0점을 맞춘다. 1그람, 1그람 소중하다. 직접 재사용 용기를 가져갔으니 세제에서 용기값을 빼야 하지 않겠나.



그다음 벌크통 밸브를 열어 원하는 만큼 병에 세제를 담는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세제를 박박 긁어오느라 통째로 부었다. 요 벌크통은 제조공장으로 돌아가 세제를 가득 채운 채 다시 돌아온다. 재사용된다는 얘기. 


용기의 입구가 넓으니 붓는 일이 수월하다. 나이스한 선택이었다. 한 번 간 김에 가득 담으니 1157g이 나왔다.



마치 꿀같이 꾸덕한 요 무환자나무 세탁세제는 국산 무환자 열매 추출물이 가득 들어있다. 게다가 이 세제를 직접 사용하고 있는 사장님이 고농축 세제라 조금만 써도 된다고 하셨다. 따로 사용량 기준을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수건 12장에 30g짜리 잼병을 기준으로 1 컵반쯤 사용했다. 기존 세탁세제의 뚜껑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감을 믿어보자.



세탁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움. 수건 한 올 한 올 보송함이 살아있는 것 좀 보세요. 

원래 사용하던 세제는 캡슐형이라 세제 양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가끔 세탁 양이 적을 땐 만져보면 뿌득뿌득한 세제 느낌이 났다. 미세 플라스틱 문제로 섬유유연제도 쓰지 않다 보니 다 마른 수건은 늘 버석거리기 까지... 부드러운 수건은 섬유유연제와 건조기 사용자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세제 하나 바꿨다고 이게 된다. 



나는 수건은 수건끼리만 세탁하는 편이다. 문제는 수건은 모아놓으면 꼭 꿉꿉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를 지우기 위해 세제는 늘 포근포근한 향을 선호했다. 왠지 수건에서는 비누냄새가 나야 할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사 온 건 무향이다.


이 무환자나무 세탁세제는 원래 레몬향이다. 그런데 송포어스에는 특별히 무향이 있다. 비결은 고양이 집사인 송포어스 사장님이 직접 주문하셨기 때문. 고양이에게 시트러스 계열 향은 치명적이라고 한다. 수건에서 진짜 아-무 냄새도 안 난다. 말 그대로 무향. 냄새는 냄새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세정력으로 없애는 것이었나 보다. 


세탁 전
세탁 후 자연 건조

천연세제는 왠지 세정력이 약할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 세정력을 증명하고 싶었으나 나는 옷이나 수건에 뭘 묻힐 일이 없다. 그리하여 다섯 살배기 아들이 있는 동네언니에게 세제를 나눔 했다. 흙놀이에 빠진 꼬맹이의 양말은 좋은 실험대상이다. 

따로 애벌빨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럼세탁기에 넣고 돌린 결과물. 얼룩이 완벽하게 사라지진 않았다. 뭐, 여타의 세제들도 흙 얼룩은 저 정도까지 밖에 안된다고 한다. 뛰어남까진 몰라도 할 만큼은 다 한다.


그래도 더욱 강한 세정효과를 원한다면 세스퀴 소다와 과탄산소다를 활용해보자. 얼룩이 있다면 세스퀴 소다를, 하얀 빨래를 원한다면 과탄산소다를 추가하면 된다. 이 또한 대부분의 리필샵에서 구입 가능하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렇게도 가능하다는 답변을 주고 싶다. 

얼마 전 들은 강연에서 '자원순환을 위한 재사용 활동'에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런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반면,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계속해서 활동을 지속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했다. 한번 해보면 생각보다 번거롭지 않고, 만족도도 높다는 것. 


그러니 집 가까운 곳에 리필샵이 있다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한다. 생각보다 안 귀찮다. 침대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집순이가 인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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