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불안할 예정입니다만》
- 불안한 나를 고치지 않기로 한, 아주 개인적인 결정의 기록
Part 2.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내기
2-4.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오롯이 내가 '진짜 나'로 존재하는 순간
- 회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는 나는 사라지고, 화실에서는 '진짜 나'로 돌아온다
나는 올해로 20년 차 직장인이다.
2004년에 첫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어느덧 시간이 흘러 두 번의 강산이 변했고
나는 이제 중년이라 불리는 나이에 서 있다.
20년을 일했지만, 회사 명함을 떼고 나면 '나'라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회사라는 이름 아래 묻힌 시간들 속에서, 나 자신은 점점 옅어져만 갔다.
회사는 나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내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 회사는 나를 끝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 긴 시간 속에서 그림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게 가장 다행한 일이었다.
주제를 정하고, 기획을 세우고,
새로운 재료를 써가며 나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만들어가는 시간.
그 시간만큼은 명함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나로 살아가는 시간이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벅차다.
출장 후 밀려든 일, 월요일 아침부터 쌓인 업무에 진이 빠진다.
기운이 쪽 빠진 채 퇴근한 어제도, 마음은 그저 바닥이었다.
그런데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도 온몸에 에너지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하루를 새로 시작하듯,
그림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초집중 상태가 되었다.
특히 새로운 재료 위에 물감을 얹는 감각이 익숙해진 덕분에
붓질이 막힘없이, 술술 이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놀라울 만큼 작업이 많이 진척되었고
그날 마지막으로 화실을 나서며 문단속까지 하고 나오는 순간,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가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나는 온전히 ‘지금 여기’에 머문다.
붓 끝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고, 손의 감각에 마음이 따라간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수많은 생각과 불안도 그 순간만큼은 조용히 옆으로 밀려난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명상이다.
그림을 그리는 그 짧은 몰입의 찰나, 나는 불안과 분리된다.
그림 안에서, 나는 비로소 안전하다.
회사에서는 ‘역할’로 살아가고
화실에서는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이 두 세계를 오가며 균형을 잡는 것이 지금 내 삶이다.
지쳐도, 흔들려도,
나는 오늘도 그림 앞에 선다.
이번 주도, 그렇게 다시 살아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