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지는 건
지쳤다는 뜻일까. 번아웃일까.
아니면 호르몬의 장난일까.
마치 내 몸이 저 바다 깊은 심연으로
계속 가라앉는 기분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보지만
나는 굳이 왜 그런 건지 분석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우울은 더 깊어지고,
설명하려 하면 말이 자꾸 어긋난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날엔 이제 우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것들에 잠깐씩 기대게 된다.
밖으로 나갔을 때
얼굴로 그대로 쏟아지는 눈이 부시도록 따뜻한 햇살.
그 햇살은 나를 위로하지도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지도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직은 잘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사무실에서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추억의 노래가 다시 조금의 기운을 준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 정확하게 나를 데려간다.
아무 생각 없이 듣던 그 시절의 나로...
아무 설명 없이 웃던 나로.
사무실 책상 한편의 모닥불 조명을 한참 쳐다보기도 한다.
일하다 가끔 쳐다보면
마치 불멍처럼, 나의 마음을 잡아둔다.
고요하고 평안하게...
작업실에 가서는
보풀은 엄청 일어났지만
따뜻하고 익숙한 양말을 신는다.
그냥 양말을 신는 것 뿐이지만
그 순간이 이제 그림에 집중해 보자는 리츄얼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보리차 한잔.
특별할 것 없는 맛인데도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면
뭐 아직 너무 최악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안국동 여기저기, 골목들도 생각해 본다.
지금 당장 달려갈 수는 없지만
대신 그 골목을 걸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자주 멈춰 서던 자리,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시공간이 달라 보이던 공간들
바로 그 거리에 가볼 수는 없기에
인터넷으로 그 거리를 검색해 찾아보기도 한다.
지도 위에서 손가락으로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잠시라도 내가 그 공간을 다시 걷는 상상이 펼쳐진다.
실제로 걷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다이어리 한쪽에 붙어 있는 스마일 스티커 하나.
그 스마일이 나를 웃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그 자리에 있는 한
몇 초간 잠깐 기분이 나아진다.
사람들은 말한다.
힘들 땐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의미를 붙여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힘들 때
사람을 하루 더 버티게 하는 건
대개 이런 무용한 것들이다.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고,
미래를 보장해주지도 않지만
그날 하루를
조용히 넘기게 해주는 것들.
나는 지금도
그 무용한 것들에 기대어 살아간다.
생각해 보면
아마 나는 언제나 그랬다.
그게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를 계속 살아 있게는 만든다.
그래도 제법 괜찮게 버티고 있구나,라는...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것 하나를 곁에 두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