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워 J’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 계획을 세우면, 항상 그 끝에 디데이를 붙여왔다.
나는 내가 단순히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사랑했던 건
계획 그 자체라기보다 날짜가 선명하게 정해진 삶이었다.
긴장감을 가지고 그 날짜를 향해 걸어가는 나 자신이 주는 묘한 안정감.
디데이가 정해지면 1차적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오늘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이는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진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정교한 ‘시스템’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덕분에 일을 시작한 지 20년 동안 홍보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다.
진짜, 단 한 번도 없다.
나에게 마감이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약속이기에,
마감이 정해지면 스스로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라는 조건을 붙인다.
그게 나의 장점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내 인생을 지독하게 피곤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디데이를 잡는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성향이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유화 몇 점을 겨우 완성해 놓고 덜컥 첫 개인전 계약을 해버렸던 것도,
첫 개인전이 끝나자마자 불과 8개월밖에 안 남은 초대전을 또 수락해 버린 것도
다 그놈의 성향 탓이다.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닌지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직장인으로 살고,
퇴근 후에야 비로소 붓을 잡는다.
주말도 예외는 없다. 오로지 그림, 그림, 그림이다.
몸보다 마음이 더 바쁘다.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 한편에선 계속 그림 생각이 이어진다.
디데이를 지키기 위해, 나는 매일매일 조금 무식하게 달려 나간다.
내 그림은 ‘손’보다 ‘머리’가 더 앓는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얘기한다.
그림 그리면서 힐링되고 쉬고 좋겠다고...
하지만, 아니다.
내 작업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스마일미러볼을 상상하고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는 늘 두 배로 쌓인다.
무엇을 그릴지 쥐어짜 내야 하는 창작의 스트레스.
그것을 실제로 캔버스 위에 구현해 내야 하는 수행의 스트레스.
이럴 때 나는 BTS의 노래 <Dionysus(디오니소스)> 중 한 소절을 떠올리고 웃곤 한다.
“창작의 고통~” (다 먹어치워 버려)
오늘 확인했다. 남은 시간 49일.
3월 중순. 초대전까지 남은 시간은 49일이다.
며칠 전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놀라버렸다.
지난 6월부터 지금까지 그려낸 그림이 무려 스물아홉 점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초대전 준비를 시작할 때는 열 점 정도만 그려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스물아홉 점을 완성해나가고 있다.
나는 늘 과로하고, 늘 무리한다.
컨디션이 좋은 날보다 안 좋은 날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가올 디데이를 준비하며 긴장과 동시에 설렘을 느끼고 있다.
디데이는 나를 키웠다.
디데이가 없었으면 개인전도, 초대전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고, 나를 지키기 위한 루틴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디데이의 단점도 있다.
디데이가 정해지는 순간부터 나는 오직 목표만 보고 달린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풍경들은 삭제된다.
내 몸이 보내는 비명 같은 신호들, 그리고 가족과의 시간들...
‘목표’를 맨 앞에 세우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자꾸 뒤로 미뤄둔다.
디데이는 나를 성장시키지만, 때론 나를 고립된 섬으로 만든다.
내가 너무 강하게 달리는 바람에 누군가는 숨이 차고, 누군가는 부담을 느낀다.
가끔은 나조차 ‘나 자신’이 벅찰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또 다음 디데이를 잡을 것이다.
계속 움직이면서, 계속 만들어내면서...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성장시켜 나갈 것이다.
50일 뒤, 나는 전시장에서 내 그림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때의 나도 완벽하게 지쳐있겠지만,
그럼에도… 벌써부터 그 ‘피곤한 영광’의 순간이 기대된다.
★ 스마일미러볼 윤지선 작가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unthing_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