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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임상심리사
May 02. 2022
시끌벅적한 시장길을 지나 서울에서 익숙하게 보아온듯한 변두리의 골목길이 나타났다. 붉은 가로등 빛이 자욱한 안개처럼 보였다. "오빠는 인간이 왜 산다고 생각해?" 멀대같이 큰 그를 올려다보며 내가 물었다. "글쎄, 나는 이 세상에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지난주 병원에서 만난 아이는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손은 왜 그러니?" 내가 묻자 아이는 "봉합 수술 했어요."하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이는 죽고 싶어 했다. 면도칼로 왼쪽 손목을 깊게 그은 것도 벌써 두 번째다. 아이는 검사 과정 내내 나를 힘들게 했다. "이딴 건 왜 해야돼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실 아이에게 이 세상에 있는 것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그저 훈계로만 느껴질 말들이었을 것이다. 끝내 아이에게 그 어떤 의미도 찾아주지 못한 나는 아이가 마지막에 뱉었던 그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렇게 까지 살아서 뭐하죠?"
아이야, 사실 나도 그걸 몰라. 나 역시 끝없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 그런 점에서 너와 내가 닮았다. 우린 아주 다른 처지에 놓여있는데도 말이야.
인간은 왜 살아가는 걸까. 깊은 물속의 고래 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는 매처럼, 산속의 노루처럼, 보닛 위의 고양이처럼 그저 살아가지 않고 왜.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은 학회에 등장할 때마다 같은 말을 한다. "모든 인간은 고통스럽습니다. 진짜예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곤 장난스럽게 웃는 그 얼굴이 나는 좋다.
그것은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 산다는 것. 고통은 내 인생에 사사로이 존재한다. 지극히 나를 닮았고 나에게 달려 있으며 나의 모든 공간에 있다. 그것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것은 나를 압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나는 기어이 살아간다. 기꺼이가 아니고 말이다.
요즘의 나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를 압도하는 정도의 존재감이 없을 뿐이다. 오늘은 머리를 감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인간은 왜 말을 저따위로 할까. 전화를 걸어서 아작을 내버릴까하다가 말아버렸다. 괴롭다. 괴로워. 그냥 내버려둔다. 저런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는 세상이니. 그래. 어떻게 나 마음 편한대로만 살아가겠나.
하찮은 고통감을 감내하다가 다시 그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에게 세월을 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이가 그 짧은 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단정 짓지 않고 기어이 살아나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기어이 살아나가다보면 너도 무수히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변화하게 되지 않을까.
삶은 끝 없는 연습이니까. 살아나가는 중에 새로운 일을 겪고, 수용하거나 포기하기도 하는 거니까. 나와 맞는 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것을 감내하면서 이전과 다른 나를 알아차리게 되니까.
삶은 연습이고 연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나봐. 너가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 기어이 살아가면서 말이야. 어제보다 삶에 능숙해진 네 모습이 마음에 들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