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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핍의 임상심리사 Jun 08. 2022

사슴 같은 아이

아이는 청소년기라고 짐작하기 어려울만큼 작고 왜소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뼈대가 보이는 마른 몸으로 자꾸만 책상에 엎드렸다. 동그란 팔꿈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제 못잤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꼭 약에 취한 아이 같았다. 검사 시간 내내 나는 아이를 깨우느라 곤혹스러웠다.


아이는 검사실에 들어올 때부터 무기력했다. 대화를 하다보면 조금 각성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검사 시간 내내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검사가 끝난 후 대기실을 내다보았을 때 아이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 아이는 어머니 어깨에 기대어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익숙한듯 무표정했다.


아이는 가정폭력 피해아였다. 아이가 폭력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폭력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짓밟고 때리는 것을. 작은 아이가 올려다본 그 광경은 어땠을까. 아이는 어떤 생각을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얼마전 치과 치료를 받으면서 불쾌한 소음과 통증이 끝나기를 바랄 때 참 시간이 길게 느껴졌었는데. 내가 상상한들 아이의 공포에 공감할 수 있을까.


수련생 시절 슈퍼바이저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슴이 천적에게 물리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

아니요.

축 늘어져. 죽은 거처럼.

죽은 거처럼 위장하는 건가요?

아니. 모든 감각을 최소화하는 거야. 고통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선생님은 PTSD 환자에 대해 설명하던 차였다. 그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반복적으로 놓여졌을 때, 우리 생물은 그 고통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눈을 감고 감각을 최소화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회피 기전이라고 하기엔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는 중추신경계의 전원을 꺼버리는 상상을 했다. 


아이는 전원을 꺼버렸을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종일 잠만 자는 저 사슴같은 아이가. 슬쩍 눈을 떴을때 아무일 없다는 듯 보이는 그 장난스러운 미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이는 투사검사에서 자꾸만 같은 맥락의 반응을 보였다.


꼬마 아이가 길을 걷고 있다, 위를 올려다 본다.

작은 사람이 있다. 꼬마 아이.

까만 밤, 도시의 밤


아이는 이미 성장한 청소년이었지만, 사실은 그 꼬마 아이에 불과했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하얀 이를 내보이며 실실 웃었지만, 사실 아이의 세상은 까만 밤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동그란 팔꿈치 때문이었을까. 그냥 눈을 감아버린, 축 늘어진 사슴처럼 보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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