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포퓰러 음악의 행방을 예언한 기념비적 명반

#2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 < ハレンチ >(1967)

by 황선업

* 서적 < Jポップを創ったアルバム >(2008)의 내용을 번역해서 올리는 컨텐츠입니다.

* 저자 : 키타나카 마사카츠(北中正和, 1946~), 일본의 음악평론가, < New Music Magazine > 창간멤버.


어렸을 땐 기억력에 그럭저럭 자신이 있었기에, 어른이 옛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잘 알 것 같다. 전에 그토록 명료했던 기억이, 안개에 둘러쌓여 있다거나, 쏙 빠져있거나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도 뭣하지만, 내가 일본의 포크에 적극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것은 1967년 즈음 당시 살고 있던 오사카에서 타카이시 토모야가 부르는 프로테스트 송을 만났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 전년도인 1966년에는 마이크 마키의 ‘바라가 사이타(バラが咲いた/장미가 피었다)’가 히트해, 포크송은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긴 했지만 가사 측면에서 재미있는 노래가 엄청 많았냐고 한다면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타카이시나 나카가와 고로의 노래는 그들의 주장에 찬동하던 말던 그때까지의 일본음악에는 없던 그 화법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타카이시의 노래를 들었던 날은, 우연히도 메모를 해 놓은 덕에 확실히 기억한다. 1967년 1월 19일, 오사카시 키타구 오오자카 대학 나카노지마 대강당이었다. 그 날, < 베트남에게 평화를! 시민연합 > 주최의 베트남 반전집합이 있어 일본을 방문 중이던 존 바에즈가 게스트로 참가했던 탓에 끌려가다시피 했다. 정말 나란 사람은 유행에 휩쓸리는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바에즈는 가수로서 집합에 출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지집회에서 노래했다는 것이 발각되면 계약위반으로 콘서트 전에 국외추방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노래하고 싶어도 노래할 수 없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폐회전에는 ‘Blowin’ in the wind’, ‘We shall overcome’를 불렀고, 엄청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국외추방이라니 오버하기는,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베트남 전쟁이 격함을 더해가 길거리에서 반전데모와 기동대의 충돌이 반복되던 시대. 반전활동가로 알려진 그녀의 투어에서는, 무대통역을 맡은 타카사키 이치로가 CIA에 협박당해 그녀의 정치적 발언을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 전했던 사건도 있었다. 바에즈의 음악과 정치에 작용한 이토록 선명했던 알력은 정치에 문외한인 나와 같은 사람들의 기억에도 강하게 새겨져 있다.


그 집합에 나와 ‘오레라노소라와텟판다(俺らの空は鉄板だ/우리들의 하늘은 철판이다)’나 소다 아젠보의 ‘논키세츠(のんき節)‘ 불렀던 것이 타카이시 토모야였다. 이 노래는 도쿄에서는 만담으로 전해졌지만, “거지다 거지다, 그 거지가, 거지가 아닌 듯한 얼굴을 한다”, “명예명예라고 치켜세워놓고, 소중한 아들놈은 그렇게 힘없이, 총포의 먹이로 만들었는가(名誉名誉とおだてておいて、大事な倅をむざむざと、鉄砲の餌食に誰がした)” 같은 가사에 ‘하하논키다네(ハハノンキダネ)’를 붙여 부른 ‘논키세츠(のんき節)’에는 몇십년도 전에 만들어진 노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감이 있었다. 다른 한 곡인 ‘오레라노소라와텟판다(俺らの空は鉄板だ)’는 철야로 일하는 지하철공사노동자의 기분을 부른 노래. 그것들엔 같은 포크라고 해도, 세련된 팝 풍미의 ‘바라가 사이타(バラが咲いた)’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을 계기로 이런저런 라디오 음악방송을 찾아보는 사이에 만났던 것이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음악이었다. 처음으로 들었던 때에 아직 레코드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67년 전반의 방송국의 공개녹음이었던가, 그게 아니면 콘서트의 중계이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임진카와(イムジン河)’, '소란세츠(そうらん節)’, ‘효탄지마(ひょうたん島)’등을 부르고 있었다. 가사 메시지의 비중이 컸던 타카이시의 노래와 다르게, 그들의 노래는 코믹한 것부터 진지한 것 까지 폭넓었고, 유쾌하고도 즐거워서 듣는 즉시 바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라이브를 딱 한 번 본적이 있다. 67년 12월 23일 오사카 산케이 홀의 빅 후테나니였다. 그날은 타카이시 토모야를 비롯해, 몇 팀의 출연자가 더 있어, 그들의 연주는 30분 정도. ‘임진카와(イムジン河)’, ‘소란세츠(そうらん節)’, ‘효탄지마ひょうたん島’, ‘카에테키타욧파라이(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 ‘아메오후라세나이데(雨を降らせないで)’ 등을 연주했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것 이상으로 생기 넘치고 재미있는 스테이지였다.


지금 열거한 곡은 그들이 해산기념으로 300장 정도 자주제작했던 < 하렌치(ハレンチ) >라는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제작은 67년 8~9월, 발매는 10월) 그 중에서도, 교통사고가 난 주정뱅이가 천국에 가, 신에게 설교를 듣는 다는 코믹한 이야기의 노래 ‘카에테키타욧파라이(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의 인기가 높아, 칸사이의 라디오에서 소개되자 리퀘스트가 쇄도했다. 그 소식을 들은 토시바 레코드가 12월 25일에 싱글로 전국 발매. 그 해 겨울 동안 270만장을 돌파하는 대히트로 기록되었고, 타카이시 등이 주도했던 프로테스트 송 이상으로 칸사이 포크의 존재를 전국에 알렸다.


너무나 큰 반향에, 일단 해산했던 그들도, 가업 사정으로 빠진 멤버를 대신해 두디 램브라즈(Dody Ramblers)의 하시다 노리히코를 영입해 1년 한정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싱글 발매 2일 전에 본 라이브는, 아마 카토 카즈히코(기타), 히라누마 요시오(기타), 키타야마 오사무(베이스)라는 오리지널 멤버 최후의 스테이지로 도중에 조그만 덩치의 사람이 가세했었는데, 아마 하시다 아니면 마츠야마 타케시였을 것이다. 더불어, ‘카에테키타욧파라이(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의 레코드는 테이프를 빨리감기했을 때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있으나, 그 콘서트의 카토 카츠히코는 보통의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 하렌치(ハレンチ) >는 오랫동안 리이슈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노래들이 당시 라디오에서 소개되었다고는 해도 문자 그대로 환상의 명반이 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임진카와(イムジン河)’의 스튜디오 버전을 보너스 트랙으로 실은 CD를 듣는 것이 가능해졌다.


보너스 트랙을 제외하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앞에 언급한 5곡을 포함해 12곡. 거의 커버곡으로, 6곡은 주로 외국어로 노래하고 있다. 커버곡은 미국의 포크 붐으로 소개된 곡이 많지만, 북한의 곡 ‘임진강(イムジン河)’을 일부 한국어 가사로 부르고 있는 것이 획기적이었다. 스페인어로 부른 쿠바의 ‘구안타나메라(Guantanamera)’나 리치 발렌스가 불러 히트했던 멕시코 민요 ‘라 밤바(La bamba)’는 포크 붐의 영역이 넓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번역된 노래엔 위트와 같은 즐거움이 갖추어져 있다. ‘소란세츠(そうらん節)’나 ‘아메오후라세나이데(雨を降らせないで)’의 가요곡 메들리는, 90년대 죠죠타이푼이나 소울 플라워 유니온으로 연결되는 것이 있고, ‘카에테키타욧파라이(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는 물론 스튜디오 테크놀로지의 활용에 선수를 치는 곡이었다. 세명 다 리드보컬이 가능하기 때문에 코러스는 두꺼웠고, 리듬을 중심으로 한 세련된 연주는 그때까지의 개러지 포크에는 없던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포크가 실질적으로 땅에 발을 붙인, 음악에 질적인 전환이 일어났던 순간을 다큐멘트화한 앨범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후 일본의 포퓰러 음악의 행방을 예언한 기념비적 명반으로서 이 앨범에 대한 평가는 지금부터 점점 더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말하는 인디즈 제작이었다는 것의 의미 역시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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