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단상

헤르만 헤세에게

by 춤추듯이

당신의 시 속에서

안개는 늘 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깊이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흐릿한 날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에서

당신은 가르치지 않았지요.

다만 강가에 앉아

흐르는 소리를 끝까지 듣는 법을

몸으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강을 건너는 중이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답을 급히 꺼내 들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수채화 속 풍경들은

완성되기보다는

머물러 있었고,

선은 번졌으며

색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했습니다.

그 그림들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삶도 그렇게

흐려도 괜찮다는 것을.


요즘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과

내가 느끼는 그리움 사이의

얇은 공기 속에서

조용히 걸음을 늦추고 있습니다.

사라진 이들이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내 안에 머물고 있다는 감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며.


아직도 안개 속이지만

이제는 압니다.

이곳이 길을 잃은 자리가 아니라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라는 것을.


당신이 남긴 문장들처럼

나도 설명하지 않고

살아가 보려 합니다.

흐르되, 도착을 서두르지 않으며

고독을 견디되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안갯속에서

당신에게 인사를 남깁니다.

나는 아직 걷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_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