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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ul 12. 2024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광주, 선유도, 군산의 초여름 열흘 2

숙소 <컬처호텔 람>에서 길만 건너면 <국립아시아문학전당(이하, 줄여서 ACC)>이다. 첫날 동명동 카페거리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ACC를 지나는데, 일군의 젊은이들이 건물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공공건물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야간에 이렇게 마구 출입해도 된다고? 심지어 계단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가 있었는데, 젊은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동네를 주름잡는 양아치들인가, 경비도 못 말리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뭔가 해코지를 당할까 봐 그들의 뒤를 밟지는 못했다.

호텔 쪽에서 바라보면 낮은 건물 두 개가 보이는데, 하나는 전시관으로 추측되는 큰 건물이고, 하나는 통로로 사용되는 구조물 같았다. 조명으로 번쩍이는 통로 쪽 구조물에 올라가 보자는 오스씨의 제안을 다리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그 자리에 서서 계속 계단 쪽을 노려보았다. 조금 지나자 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올라갔다. 가로등 불빛에 문신이 그려진 팔과 다리가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경비는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뭘까, 양아치들이 집회를 하는 건가. 며칠 전 광주에 대한 정보를 모으다가, 폭주족들을 피해 인도로 돌진한 차량에 아이들이 치였다는 뉴스를 봤다. 폭주족들이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ACC 옥상에 모여 대책회의라도 하는 걸까? 별의별 상상을 다 하고 있는데, 오스씨가 다가왔다.

"통로가 아니라 전시물이 있는 공간이야. 가볼래?"

도리도리. 내 머릿속은 온통 폭주족...

ACC의 첫인상은 이렇게 알쏭달쏭, 미스터리 서스펜스로 시작했다.


다음날 드디어 예보대로 비가 왔다. 역시 슈퍼컴퓨터.

비 올 때는 미술관이니까, ACC에 갔다. 어제 본 두 건물 사이로 들어서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그 아래로 건물들이 숨어있었다. 이제야 ACC의 건물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에 만나게 될 도슨트에 따르면, 이 건물은 10년 동안 땅을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이니 지붕이 그리 낮은 거였다. 둥근 건물 외벽은 온통 푸른 생명으로 뒤덮여 있었다. 잘 자랐다. 부산현대미술관 관계자가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이어 계단을 더 내려가자 비에 씻겨 더욱 매끈한 껍질을 자랑하는 배롱나무들이 초록을 진하게 뿜어내며 계단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우리 아파트의 가장 번화한(?) 사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것도 배롱나무로, 아파트 식생 중 가장 늦게 잎이 나고, 꽃도 늦게 펴서 일 년 내내 헐벗은 모습으로 서있지만, 한번 꽃이 피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다들 경탄을 금치 못한다. 한 번도 배롱나무의 꽃, 흔히 백일홍이라 불리는 붉은 꽃의 꽃말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는데, ACC에서는 그게 참으로 중요했나 보다. 친절하게 꽃말까지 나무 옆에 적어두었다.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하다."

이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뭔가, 왈칵, 치솟는 꽃말이었다. 그래서, 굳이 배롱나무를 심었구나, 싶은...


진행 중인 전시는 두 개였다. 온라인, 오프라인 도슨트가 다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시 59분이고, 도슨트 프로그램은 2시에 시작이었다. 곧바로 신청했더니, 아이고, 관객이 우리 둘 뿐이었다. 취소할까 했는데, 중년의 멋진 도슨트가 걱정 말라 안심시켜 줘서 기꺼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길 위의 도자>라는 전시가 먼저였다. 4명의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이 참여했고, 고국을 떠난 이주의 경험을 도자기에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녹여냈다고 한다. '린다 응우옌 로페즈'는 베트남 이민자인 어머니의 정체성과 기억을 바탕으로, 청소/걸레/먼지 등 '하찮은 것들'을 다양한 색조합으로 멋지게 표현한 털북숭이 연작을 보여주었다. '에이미 리 샌포드'는 캄보디아의 내전(일명 킬링필드)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사회가 회복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방법은 이렇다.

1. 캄보디아에서 만들어진 토기를 높이 들고 아래로 떨어뜨린다.

2. 깨진 조각들일 일일이 주워 모아 아교로 하나하나 붙여나간다.

3. 결국 원래의 모습 비슷하게 복원이 되지만, 군데군데 심하게 박살 나서 가루가 되어버린 것들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린 토기로 남게 되었다.

4. 비록 이어 붙이진 못했지만, 그 가루까지 모두 그러모아 토기 안에 넣어둔다.

깨지는 건 너무나 순식간인데, 그걸 다시 이어 붙이는 건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떤 조각은 끝내 구멍으로 남았지만, 그 흔적은 기억하기. 그것이 사회가 만든 상처를 사회적으로 회복하는 법일 테다. 사회적 상처를 개인의 상처로 떠넘기며, 돈 얼마 던져줄 테니 개인적으로 해결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훌륭한 작품이었다.

관객이 우리만 이어서 도슨트에게 질문하기 편했다. 참여 작가들은 2주 동안 광주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지내기도 했단다.

"그 시간 안에 만들어낸 작품을 저기 전시해 두었어요."

"그 짧은 시간에 작품이 나올 수 있나요?"

"작가들이 고생이었죠. 본인이 쓰던 흙이 아니라 실패도 있었고, 새벽까지 가마를 떠나지 못하면서 잠도 못 주무시고."

주최 측으로부터 숙식 제공받아가며 전 세계에서 전시회를 하는 삶은 얼마나 근사할까 생각해 왔었는데, 이런 애로점도 있구나, (상위 1%가 아닌) 예술가의 삶이 이렇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부럽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예기치 않은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는데, '스티븐 영'은 갈라지고 일그러진 달항아리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작품에 칼질을 하고 가마에 넣었는데, 꺼내어보니 완벽하게 멋진 달항아리가 나왔다. 전시회 주제와 동떨어진 작품이지만, 그 예외성조차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한 해학이 느긋하게 느껴져 좋았다.


또 다른 전시인 <이음 지음>은 건축을 통해 미술을 이해해 보는 기획으로, 흥미로운 작품이 많았다. 일단 입구로 들어서면 거대한 액정화면으로 AI가 만든 기괴한 영상을 봐야 했는데, 건축물은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것처럼 온통 일그러져 끔찍한 느낌을 주었다. 보기 싫어... 즉각적인 감상이 튀어나오는데, 도슨트가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딱 그 지점을 지적해 주었다. AI가 만드는 세상, 환호 속 너머의 싫은 무언가를 본 느낌이었다.

으스스 몸을 떨며 안으로 들어가면 원형 전시장이 나오는데, 중앙에 연못을 만들어 도자기 그릇을 띄워놓은 작품 <클리나멘>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결에 따라 흘러 다니는 그릇들이 부딪쳐 내는 청아한 소리가 전시장 전체에 울려 퍼지며 입구에서 얻은 팔뚝 소름을 가만히 가라앉혀준다. 이런 단짠단짠이라니, 분명 이 효과를 노린 게 분명하다. 전시 기획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도슨트는 마지막으로 ACC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노무현정부 때 옛 전남도청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모든 시민이 어우러질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 10년간 땅을 팠고, 이후 개관한 지 10년이 됐다는 것. 옥상은 잔디 정원으로 꾸며놓아 시민들의 나들이 공간으로 개방한다는 것.

"밤에 먹을 거 들고 한번 가보세요. 젊은 친구들이 치킨하고 맥주 가져와서 마시며 노는 모습을 보실 거예요.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입니다."

아이고, 폭주족의 회합장소가 아니었구나.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광주의 젊은이들이여.

잔디가 훼손이 되면, 다시 회복될 때까지는 출입금지, 회복되면 다시 개방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지금은 개방 중이라고. 나의 노르딕워킹 구역이었다가 잔디가 망가져서 몇 년째 출입금지인 영도 아미르공원이 생각났다. 미안하다, 잔디들아. 염치없지만 힘을 내줘.

밤에도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ACC, 비가 많이 오는데도 전시회 내부에 젊은 커플들이 넘쳐나던 ACC. 혹시 동명동 카페거리는 이 ACC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화보단 소비로 유명한 부산의 젊은 핫스폿과 비교되며, 예향으로서의 광주의 이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릇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전시회가 좋은 전시회다.

잔디가 어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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