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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면메이트를 만났다

이월기 2025 (2)

by 선우비 Feb 28. 2025

7.

석 달에 걸친 수영 강습을 마쳤다. 나의 자유형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관절이 너무 굳어서 어깨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길은 알게 된 셈이니 부지런히 스트레칭해서 멋진 자세를 만들고 말겠다 다짐!

마지막 수업 시간에 굳은 관절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다양하게 배웠다.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주면 그 자리에선 잘 따라 했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다 까먹었다.

며칠 전에 몸을 씻고 로션을 바르기 위해 잠시 풀어둔 애플워치를 깜빡 잊고 집에 갔다. 5시간 정도 흐른 후 알게 되어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안 보입니다. 다 뒤졌는데도..."

충격을 받았다. 수 년째 이 공간을 이용하면서, 수영모나 수경, 비싼 수분 크림을 놓고 오기 부지기수였다. 단 한 번도 찾지 못한 적은 없었다. 애플워치도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다. 회원 전용 파우더룸 이용자의 평균연령이 거의 칠십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싶다. 카페에 당당하게 핸드폰 두고 다니는 민족 아니었습니까! 내 안의 인류애를 감싸는 막에 쩡! 금이 가버렸다.


8.

리모컨으로 넷플렉스 상하운동을 하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테넷'을 눌렀다. 극장에서 보고, 또 유튜브 후기를 보고, '아, 이건 이과 애들이 보는 영화구나.' 포기하고 말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번 보면 뭔가 다를까?

똑같았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도 재미있긴 한데, 역시 다시 유튜브 해설을 봐도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마지막에 왜 눈시울이 붉어지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전투 해설은 두 번 봐도 모르겠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과 영화로 치부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스씨를 직장에 데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켜자마자 들리는 소리.

"그런데, 테넷에서 로버트 패틴슨이랑 주인공은 언제부터 알게 된 건지 도통 모르겠더라구요."

이잉? 이게 뭐야. 라디오가 내 머릿속 신호를 잡아서 카오디오로 재생시키는 건가?

놀랍게도 윤상이 진행하는 MBC라디오에서 테넷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날 본 영화를 다음 날 아침 라디오에서 자세하게 분석해 줄 확률은 도대체 얼마일까? 개봉작도 아닌데!

"오늘 로또 사야 되나?"

기적을 본 느낌이랄까?

그런데 방송을 계속해서 듣고 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보였다.

테넷은 한참 설명하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들을 쭉 훑다가, 마지막으로 로버트 패틴슨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결국 이번에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로 마무리.

그렇구나. 다음 주에 개봉하는 '미키 17' 때문에 패틴슨이 언급됐고, 패널이 패틴슨의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테넷이 소환됐다. 기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알고리즘의 흐름이었다.

어떤 놀랍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 광고와 홍보라는 거대한 알고리즘 어장에서 헤엄치다 마구잡이로 드리운 바늘에 낚여버린 거구나.

아, 맥 빠져.

로또는, 쳇! 사지 않았다.


10.

레즈비언 친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들은 정보다. 부산에서 가장 최근에 터진 온천이 그렇게 물이 좋단다. 오늘 오스씨가 농땡이 치고 싶다고 해서 뭐 할까 고민하다 때나 밀자고 온천을 찾아갔다. 시설이 최신식이어서 사우나에 들어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알칼리성 성분이 함유됐다는 온천물로 말할 것 같으면, 탄산온천처럼 미끌거리지도 않고, 유황온천처럼 냄새도 구리구리하지 않아서인지 딱히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때가 너무 많아서 피부가 무감각해진 걸까.

세신사에게 부탁해 때를 밀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소중이를 마구잡이로 잡아 돌리며 사타구니를 벅벅 미는 세신사는 첨 봤다.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청량한 산속 풍경 같은 걸 떠올려야 했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가, 생각해 보니 내가 잘 참으면 되는 일인데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지 싶다. 세신사가 둘이 있는데, 다음에도 '그 사람'에게 몸을 맡겨야겠다.


11.

이십 년 전에 출간한 모가 작가의 장편소설 <하추간>을 웹툰으로 제작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게 작년 가을.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지연되다가 드디어 오늘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그림 작가가 캐릭터 시트를 보내줬는데, 하추간 출판 당시 표지에 삽입되었던 두 캐릭터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보자마자 정이 갔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앞으로도 난관이 많겠지만 부디 다 잘돼서 웹툰으로 꼭 볼 수 있길.


12.

애플뮤직(애플 클래식 기본 제공)을 그만두고 유튜브뮤직으로 갈아탄 한 달. 걱정한 대로 클래식으로부터 멀어졌다. 애플 클래식앱을 열어서 최신음악을 클릭하던 습관이 사라져서다. 유튜브 뮤직도 부지런을 떨면 충분히 클래식을 즐길 수 있지만, 부지런은 앱과 거리가 참 먼 단어다. 유튜브 광고 스킵하기 버튼을 누르는 부지런을 떨지 못해 유튜브 유료가입자로 돌아온 셈이니. 아, 어쩔까나. 다시 애플뮤직으로 돌아가야 할까. 한 달에 파스타 한 접시 안 사 먹고, 둘 다 구독하면 참 편할 텐데, 난 왜 그게 안 되는 몸일까. 이상하단 말이지...


13.


대전에서 가족을 만나기 전 잠깐 시간이 남아서 서점 '다다르다'에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빨리 둘러보고 나가자 싶었는데, 갑자기 박준 시인의 시가 읽고 싶어 져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찾았다. 없었다. 인기작이라 다 나갔다고 한다. 아숴하는 모양이 신경이 쓰였는지 서점 주인이 대신 수필은 어떠냐 해서 <계절 산문>을 구입했다.

낮 시간엔 손이 잘 안 갔는데, 침대에 누워 읽으니 잠이 솔솔 왔다. 몽롱하고 나른한 문체에 커다란 깨달음을 요구하지도 않고... 오랜만에 좋은 숙면메이트를 만났다. 멜라토닌 2mg보다 나았다.

아껴 아껴 읽었지만 워낙 양이 적어서 열흘 만에 마지막 책장이 넘어갔다. 당장 오늘 밤부터 어쩌나 싶어 부산 민락동의 서점 '주책공사'로 달려갔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찾았다. 이번에도 없었다. 주인장에서 물으니 장부상으로는 있는데... 하며 한참을 책장 앞을 서성인다. 끝내 찾지 못했다. 종종 책을 그냥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주인장의 말에 요즘도 그런 손님이 있다고? 싶었다. 그렇군요, 대답하고 그냥 나오려니 마음이 좀 그래서 박준 시인의 다른 작품이 있냐 물으니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건네주었다.

'얘는 무슨 제목을 이렇게 사고 싶게 잘 짓는 거니...'

그날밤부터 다시 시인의 이야기로 잠을 청했다. 이번에도 딱 열흘거리였다. 배고프다, 거의 중독이 되어가는 걸까.

수영구 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다. 이름지어먹는 그 시집이 거기에 있었다. 여기서 빌릴까, 아니면 사서 읽을까, 고민하다 그냥 빌렸다. 22페이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까지 읽었는데, 살걸 후회가 되었다. 이런 작가는 정말 돈 많이 벌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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