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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범일동 졸업식, 할 수 있을까?

사월기 2025 (2)

by 선우비

6.

결혼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 결혼했다고 포스팅을 했는데, 연동된 스레드에도 같은 내용이 올라갔던 모양이다. 하루가 지나서 2만 5천 명이 내 스레드를 봤다는 알림이 왔다. 오스씨의 얼굴은 뒷모습만 보이지만 내 얼굴은 그대로 나와서 혹시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헉, 당황했을 수도 있겠다 걱정됐다.

기우였다. 세상은 무심히 흘러갈 뿐이다.

가족들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가족의 의견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제로에 수렴된 지 꽤 되었다. 우리는 대체로 쿨하고 무심하게 서로의 안부를 챙기고, 머리 싸맬 고민거리를 주고받지 않는다. 어느 쪽을 강조하냐에 따라 신뢰가 깊다면 깊고 관계가 얇다면 얇다. 한때 원치 않게 쫄깃하고 끈적거리던 시절을 거쳐서인지 난 지금의 이 관계가 되게 마음에 든다. 나이 듦의 다양한 장점 중 하나로 꼽을 정도다.

언젠가 식사를 할 기회(1년에 두세 번 정도 만난다)가 오면 그때,

"아, 맞다. 우리 결혼했어. 미국에서. 이제 한국만 벗어나면 (대체로) 부부로 인정받아."

남 얘기하듯 툭 던질 생각이다.

"오, 그런 일이!!!"

감탄사 몇 마디 듣고는, 곧바로 임영웅 이야기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전개가 마음에 드는 가족 관계도 있다.


7.

결혼 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리 둘의 텔레파시 지수는 좀 높아진 듯하다.

오스씨가 저녁을 밖에서 먹고 오는 날, 난 집에서 넷플릭스에서 볼 프로그램을 찾다가 <최애의 아이>를 클릭했다. 주제가인 요아소비의 <아이돌>이란 노래는 좋아하지만 정작 애니에 관심이 가질 않았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당겼다.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전개가 펼쳐져 넋을 놓고 보는데, 오스씨가 집에 왔다.

손에는 지하철 입구에서 샀다며 잡지 <빅이슈>가 들려있었다.

그런데, 앗, 이게 뭐야.

잡지 표지가 <최애의 아이> 일러스트다. 2025년 3월, 커버스토리로 최애의 아이를 다루고 있었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일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이렇게까지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지금 먹고 싶은 음식이 뭐야? 동시에 말해보자."

"떡볶이!"

"떡볶이!"

이런 수준이 아니다.

심지어 저 잡지도 마지막으로 샀던 게 칠팔 년 전이다.

이건 복권이라도 살 정도의 운빨이 아닐까?(지난달에 이어 계속 복권 타령)

뭐가 됐든, 우리 이제 20년인데, 이 정도로 잘 통하면 잘 살아왔다는 증거겠지.

운명에게 박수받는 기분이었다. 좋다!


8.

넷플릭스에서 오스씨가 보는 건 공포영화, 난 애니메이션이다. <나 혼자 레벨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면서 느낀 건, 역시 원작을 보고 싶다는 것. <나 혼자 레벨업>은 특히 원작이 판타지 웹툰의 끝판왕이란 이야기가 있어서 정주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웹툰은 컷 하나가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로는 한 화면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아래로 길다. 특히 전투씬의 경우엔 스크롤을 죽죽 내려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 그런 컷이 그림 작가가 뼈를 갈아 만든 명장면일 경우가 많다. 다른 작품 볼 땐 잠깐 불만일 정도였는데, <나 혼자 레벨업>은 그런 씬이 너무도 많다.

제대로 보고 싶어!!!!!!

세로로 더 길게 이어진 모니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부글부글 끌어 오르던 차에,

"어, 맞다! 오스씨, 사무실에 스탠바이미 있었지?"

"응. 왜?"

"집으로 가져와~"

"알았어."

생각보다 자주 안 쓰게 된다고 했던 물건이라 별다른 고민 없이 스탠바이미를 집으로 가져온 오스씨. 그 이후 자신의 결정을 크게 후회하게 되는데….


스탠바이미로 <나 혼자 레벨업>을 본 사람이 있을까?

이건 진짜 진짜 신세계다.

<아바타>를 아이맥스로 보는 느낌이랄까?

스크롤을 내리다가 컷의 시작을 잊어버리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장대한 컷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판타지나 무협의 액션씬은 웹툰으로 구현할 때 특유의 전투 기법을 구현하는 다양한 컬러 효과 때문에 작은 화면으로 보면 마법과 장풍이 누구 손에서 나와서 누구 몸에 어떻게 타격을 가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그 모든 효과를 커다란 화면으로 한 컷에서 보니 장면 이해도가 훨씬 높아진다. 몰입도도 끝내 준다.

그동안 전투씬 효과가 너무 화려해서 정신 사납다는 이유로 중도포기했던 <전지적 독자시점>과 <나혼자만렙뉴비>, <역대급 영지 설계사>, <묵향 다크레이디>를 다시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역시! 대형 화면 만만세!!!

웹툰 세계와 다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나를 보며 한 마디 하는 오스씨.

"저거 도로 가져가야겠다."

“안 돼!!!”

이젠 더 이상 웹툰을 스마트폰으로는 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반려가전이란 말이 이토록 찰떡일 수 없는 스탠마이미.

역시 가전은 LG.

요상한 결론.


9.

부산은 범일동이란 동네에 게이바들이 몰려있다. 그 범일동이 아파트 재개발 때문에 사라지게 됐다. 오래전부터 나온 이야기지만,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 흐지부지 되지 않겠나 싶었는데, 결국 하게 된 모양이다. 대부분의 가게가 여름까지는 건물에서 쫓겨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서울 익선동도 비슷한 이슈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곳은 코로나 덕(?)에 개발광풍이 멈추어서인지 게이바들이 여전히 장사를 하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부산은 '아파트의 도시'답게 미분양이 넘쳐나도 재개발은 멈추지 않았다.

정들었던 가게가, 거리가 통짜로 사라진다는 사실 앞에서, 처음엔 자연재해 같다... 그저 억울할 뿐이었는데, 몇 달째 계속 같은 주제로 술집 사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범일동을 사랑하는 게이들이 모여서 이곳의 추억과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그리고 새롭게 옮겨가는 곳의 희망을 담아서... 일종의 졸업식처럼.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더니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장님이, 다른 가게 사장들과 만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며,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냐 반문했다.

그러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주 홍예당 이사 자격으로 운영위원회에 처음 참여했다. 자료를 넘겨보던 중 캐나다 대사관에는 엘지비티큐 인권단체를 상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글귀를 발견했다. 곧바로 범일동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 사라지는 범일동 가게들을 취재해서 범일동의 역사나 발자취를 잡지형태의 책자로 남겨보면 어떻겠나, 사진을 많이 찍어서 전시회를 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캐나다 대사관의 지원을 받아서 해볼 수 있을까?

다른 운영위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단체나 개인들도 '범일동을 남기자'는 이야기를 해왔다는 거다. 다들 안타까워하고는 있지만 시간과 금전적 지원/직접 발로 뛸 인력 등의 문제로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다른 소수자 운동도 마찬가지겠지만 퀴어 활동은 특히나 원래 사람도, 돈도 없으니까. 이런 지방은 특히.

운영위원회가 있던 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단골 게이바에 놀러 갔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사장에게 말하자,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오랫동안 범일동을 지켜왔던 터줏대감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다, 한 가게에 모여서 좌담회를 하자,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전해주었다. 지원을 받게 된다면 시도할 수 있는 콘텐츠는 충분해 보였다.

며칠 후 홍예당 대표에게 캐나다 대사관에 낼 기획서를 만들어볼까, 언질을 넣었더니 이런저런 정보를 주었다.

어... 정말 될까?

범일동 졸업식... 할 수 있을까?

오월기엔 부디, 그 내용이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


2021년에 딱 한 군데 통신사에서 기사가 났다. (누군지 모르지만, 기자님 감사합니다.)

이제 다 밀려나가는데, 이번에는 이런 기사조차 없다.

범일동 졸업식을 해서 그곳이 존재했었음을 알리는 기사가 많이 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21/0005432121?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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