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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수영구 퀴어모임(가칭 수퀴모) 영원하라!

오월기 (1)

by 선우비

1.

만화 <열혈강호>가 연재를 시작한 지 30주년이란다. 대원씨아이에서 <열혈강호 30주년의 기억>이란 제목으로 크고 무겁고 고급스러운 재질로, 과연 기념이란 말에 어울리는 포스를 잔뜩 풍기는 책을 발간했다. 가격은 55,000원이다. 팬이 아니고서는 절대 사지 않을 내용, 가격이다.

그런데, 아이고... 난 팬이다. 전권을 소장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단행본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초반에 나온 책들은 책곰팡이에 대부분 잠식된 상태였다. 코로나 시기에 집에 갇혀서 할 일이 없으니 괜히 오래된 만화책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깨끗한 것은 알라딘이나 예스24에 팔고, 곰팡이가 슬거나 벌레가 흔적을 남긴 책은 치워버리기로 했다. 내다 버리는 것은 아니고, 도서 절단기로 책 등을 잘라내고, 한 장 한 장 스캐너를 이용해 PDF파일로 만드는 작업을 3개월 동안 했다. 책꽂이에 두 줄씩 꽂혀있던 책들이 보기 좋게 한 줄로 배열되어 찾아 읽기 편해졌다. 오염이 심한 열혈강호 1권부터 38권까지는 스캔본이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종이책으로 살아남아있다.

요즘의 열혈강호로 말할 것 같으면, 끝나야 하는데 여러 경제적 사정으로 끝낼 수 없는 느낌? 100권을 채우려고 작가가 무리하는 느낌? …같은 전개로 나의 마음에서 살짝 떠나 있었다. 그래서 올해 나온 92권부터는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으로 구매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그런데 30주년이라는 말에 새삼 감동하고, 책 속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올해 안으로 완결을 지을 듯하다니, 괜히 전자책으로 돌아섰나, 자책하게 되었다. 진작 알았으면 계속 종이책으로 달리는 건데...


열혈강호 30주년이란 말에 굳이 꽂혀서 결국 5만 원을 주고 책을 샀다.

올해는 내가 게이 커뮤니티에 입문한 지(게이들은 이걸 '데뷔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딱 30주년 되는 해다. 열혈강호가 세상 밖으로 나온 해에 나도 벽장에서 세상으로 나왔고, 애인도 생겼다. 영원히 기억될 그 해, 같은 '데뷔 동기'라는 말에 높디높은 가격의 장벽을 그냥 넘어버렸다.

두근두근 랩핑되어 있던 책을 뜯어서 읽기 시작했다. 곧바로 AEC! 욕설을 내뱉었다.

알고 보니 이 책의 출판은 올해 4월이지만 작년에 기획이 되었고, 그래서 열혈강호 30주년은 사실 작년이었다는 스토리. 뭐야, 이런 게 어딨어. 속았다.

그래도, 괜찮아. 원래 팬은 호구니까.

작가 인터뷰를 보고, 그 지난한 세월을 함께 보내게 해 준 내 청춘의 기록을 읽으면서, 조금 울었다.

이런 눈물은 귀한 거니까, 5만 원이 아깝지 않다....로 다시금 호구 인증!


2.

5월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오스씨의 첫 조카 부부(나와 동갑이다)가 부산에 내려와 술자리를 함께했다. 예전에는 부산에 와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애들인데, 작년 이맘때 독특한 맛집에서 대접해 준 게 계기가 되었는지, 이제는 우리와 어울리는 시간을 꽤 즐기는 듯했다. 이번에도 남천동의 비밀 맛집으로 이끌어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사실 오스씨의 형과 누나에게는 오래전 커밍아웃을 했지만, 조카들에게는 딱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니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거리낌 없이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런데, 불과 몇 주 전 괌에서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말이 나오지 않았다.

2차로 자리를 옮기던 길, 문득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다니. 왜 그랬을까?’

혹시 나 스스로 이번 결혼을 별다른 의미 없는 일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아니면, 늘 '우리 조카'라 부둥켜안던 아이들을 어쩌면 '별다른 의미 없는 관계'로 치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일 일도 아니다.
커밍아웃처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그들과는 무관한 내 삶의 일부로 여기는 것일 테다.

"우리, 사실 결혼했어."

이 말을 들었다고 해서,

"삼촌! 어떻게 그런 중요한 일을 우리한테 알리지도 않고 몰래 해요? 너무 실망이에요. 삼촌한테 우리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였어요?"

라고 붉어진 얼굴로 항의하거나, 삐쳐서 1년은 얼굴도 안 보겠다고 말할 리 없다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아마 상황은 완전히 달랐겠지만.

그래서였을까. 눈앞에서 생글거리며 ‘삼촌삼촌’ 부르는 아이들이, 순간 조금 멀게 느껴졌다.
이제 이들과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조차 나눌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죽음 같은 무거운 이야기들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휑해졌다.

술이 오른 조카들은 2차에서 사케를 두 병이나 시켰고, 생각보다 큰 금액이 나왔다.
원래라면 절대로 돈을 못 쓰게 했을 텐데, 그날은 그냥 냅뒀다.
괜히 그러고 싶었다.
‘이게 축의금이야.’ 속으로 혀를 쏙 내밀며.


며칠 후, 내 가족 단톡방에 부처님 오신 날 장어를 먹으러 간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겸사겸사 조카 생일 파티도 함께한단다.
큰누나가 절에 보시한 우리 커플의 봉등 사진을 보내왔고, 나는 충동적으로 ‘우리 결혼했어’라는 문자를 괌 사진과 함께 보냈다.

곧바로 축하 인사가 왔다. 요란한 이모티콘과 함께.

그리고 몇 시간 뒤, 가족방에 조카 생일 관련 카톡이 또 올라왔고, 나도 "생일 축하해"라는 톡을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어 형에게서, 웃음기 섞인 말들과 함께 조카 토스 번호가 찍혀왔다.
평소라면 ㅋㅋ 하며 돈을 보냈을 텐데, 그 순간 먼저 든 생각은 ‘아, 누나는 형한테 우리 결혼 얘기를 안 했구나’였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이야기는 아마, 나오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달 일기, 사월기에 그런 말을 적었더랬다.
이렇게 덤덤한 가족 관계가 오히려 좋다고.

응, 난 괜찮다.
어쨌거나 조카 토스 번호는 그냥 지워버렸다.

이번엔, 그냥 이렇게 넘어가기로 했다.


3.

부산 수영구에는 퀴어들이 꽤 많이 산다.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보니, 어느새 이웃처럼 뭉치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영구 퀴어 모임’도 벌써 3년째를 맞았다. 우리 게이 커플의 집과 레즈비언 커플인 삭미네 집이 주된 아지트이지만, 종종 다른 지역에 사는 퀴어 친구들이 게스트로 합류하기도 한다. 지금은 단톡방에 14명이 등록되어 있다.

이 모임의 큰 연례행사 중 하나는 단연 ‘광안리 어방축제’다. 온갖 재미있고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그냥 먹고 마시기. 먼저 도착한 선발대가 광안리 해변, 먹거리 판매대 앞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면, 이후 시간이 되는 대로 하나둘씩 사람들이 도착해 함께 음식을 나누고, 웃으며 수다를 떤다.

올해는 11명이 모이기로 해서 세 장의 돗자리를 넓게 펼쳤다. 전날 비로 인해 본 행사가 하루 연기되어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한 우리는 작년보다 한 시간 빠른 오후 5시에 자리를 잡았다.

휴고는 여러 가지 술을 펼쳐 보였고, 쥐야다는 동네 맛집에서 공수한 오뎅, 물떡, 떡볶이를 차려냈다. 오스씨는 어방축제 명물인 활어회 코너에서 막 뜬 회를 가져왔는데, 언제 먹어도 맛있는 회지만 바닷바람 맞으며 축제에서 맛보는 회는 특히나 더 쫀득하고 감칠맛이 넘쳤다. 뒤늦은 결혼선물이라며 헤진이가 건넨 고급 막걸리는 회와 기막히게 어우러졌다. 회랑 막걸리가 이리도 궁합이 좋다니... 이래서 어방축제는 특별하다.

조금 뒤엔 아누님이 따끈한 꽈배기와 함께 도착해 탄수화물 파티가 시작되었는데, 그 찰나에 불어온 돌풍이 음식에 모래를 살짝 흩뿌렸다. 잠시 탄식이 흘렀지만, 모래사장 축제에서 이런 해프닝쯤은 뭐...

이후 새로운 수영구 멤버 그레이님이 오고, 깻녹, 삭미가 차례로 합류했고, 홍예당의 스타 전인님이 역시나 스타인 라소영 배우님과 함께 자리를 빛내주었다. 마지막으로 홍예당의 신입 직원 푸른이가 도착하면서 모임은 절정으로!

곧바로 광안리의 자랑, 드론 라이트쇼가 시작됐다. 운 좋게도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쇼를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정면이었고, 먹거리와 전망, 쇼와 사람,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밤이 이어졌다.

함께해 준 친구들, 그리고 올해 함께하지 못한 분들 모두, 내년에는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수영구 퀴어모임(가칭 수퀴모) 영원하라!


4.

관심있는 분은 검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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