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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우주의 힘아, 도와줘!

오월기(2)

by 선우비

6.

홍예당 장편소설 쓰기 모임이 결국 한 달간의 휴업을 극복하지 못하고 6개월의 장기휴업에 들어갔다. 어쩌면 이번의 휴업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써온 분량을 확인해 보니 200자 원고지 900매 정도다. 기승전결로 따지면 이제 결말만 남은 셈인데, 안타깝다.


살면서 장편소설은 딱 두 번 써봤다.

첫 번째 장편을 쓸 때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보름 동안 매일 8시간쯤 썼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물에 녹듯 사라질 거야, 불안으로 가득했다. 소설 내용도 불안을 다루고 있었서 꽤 적절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때 10 킬로그램의 몸무게가 늘어났다. 우리 집은 살찌는 유전자가 있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십 킬로 단위로 살이 불어난다. 나는 데뷔(게이 사회에 입문) 이래로 스탠 몸매 청년 포지션으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주목을 받고 살았는데, 살이 찌자마자 좋다는 남자가 갑자기 확 늘었다.

뚱뚱한 체형을 좋아하는 게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도시괴담처럼 들었었는데, 체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 장편소설은 이처럼 소설 자체보다 살이 쪄버려 인기가 올라간 기쁨이 더 컸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 살 덕에 살찐 남자 좋아하는 오스씨를 만난 것이니, 진짜 복덩이 소설.


두 번째 장편소설은, "넌 연애소설 참 못 쓰더라."라는 질책을 받고 분해서 시도한 무려 4각 관계 연애 소설이다. 게을러지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00달 00일에 열리는 도서판매전에 무조건 책을 출품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시작했다. 관광버스 하나를 빌려서 게이들이 1일 묻지 마 관광을 떠난다... 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토대로 쓰기로 했다. 시작은 여느 때처럼 술술 잘 풀려나갔는데, 나의 고질적인 문제인, 분량조절 실패로 결국 하루의 절반만 소설에 담긴 채 출판이 되었다. 소설이 잘 나갔으면 이후 후속작처럼 하루의 나머지를 써서 내겠다 했는데, 망했다.

장편은 나에게 안 맞아.

두 번째 장편이 남긴 교훈이었다.


홍예당 장편 쓰기는 그렇게 멈췄던 장편 쓰기를 20년 만에 다시 시작한 도전이었다. 이대로 무너지기엔 900매가 너무 아까워.

어떻게든 쥐어짜 내서 일단은 초고를 완성하겠다고 여기서 선언하겠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다 잡지 않으면 진짜 못 쓸 것 같아.

우주의 힘아, 도와줘!


7.

사월기 두 번째 글에서 쓴 부산 범일동 졸업식(아파트 재건축으로 부산의 대표 게이 거리인 범일로 89번 길에서 영업하는 게이바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범일동 졸업식>은 사라져가는 거리를 기록해 추억하려는 기념사업 가제목) 아이디어가 홍예당 정식 사업이 되어 팀이 꾸려졌다. 캐나다 대사관에 보낼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고 싶은지 참여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게이바 사장님과의 인터뷰 내용도 정리했다.

사업은 크게 범일동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는 책자(범일동의 간략한 역사, 사장님들의 인터뷰, 범일동에 대한 추억을 담은 이용자들의 에세이 등)와 범일동 거리와 게이바 내부를 담은 사진과 영상으로 꾸민 전시회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물론 이 모든 건 그걸 구현할 수 있는 예산을 얻었을 때 이야기.

그래도 어딘 가에서 돈 떨어지기만 기다렸다가 일을 시작할 순 없어서, 일단 범일동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터줏대감 한 분과 인터뷰를 했다.


J형(60년 이전생)은 나보단 오스씨의 인맥이라 인터뷰는 나와 오스씨 둘이 진행했다. 홍예당 사업에 '회원 1'로 수동적으로 참가하던 오스씨가 처음으로 책임지고 진행하는 작업이었다.

J형은 역시 이야기 화수분이었다. 처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야기부터, 범일동 게이 거리가 생성되기 전 교통부 시절 이야기, 범일동 초창기의 모습 등,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두 시간 인터뷰를 끝내고, 이후 자리를 옮겨 술집에서 또 세 시간을 수다 떨었다. 비공식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지만, 그걸 책자에 담을 순 없겠지.

처음 사업을 기획할 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는데, 인터뷰 하나 했을 뿐인데도 이건 꼭 해야 할 사업이라는 사명감이 들어버렸다.

게이 커뮤니티 데뷔 30년 차인 데다가, 게이바 거리를 꽤나 활보하고 다녀서 이제는 조금 지겹다는 생각까지 드는 나조차도, '전혀 몰랐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가득 담기게 될 것 같다.

혹시라도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지원을 전혀 못 받게 되더라도, 사비를 털어서라도 책자만큼은 만들고 싶어졌다.

그때가 되면 텀블벅 모금도 진행할 텐데,

우주의 힘아, 도와줘!


8.

주말에 오스씨랑 대판 했다. 벌써 20년 차 부부인데도 싸움의 후유증으로 잠을 설칠 정도의 열정이 남아있었나 보다. 거의 못 잔 오스씨는, 결국 출근하지 않았다.

갑자기 시간이 나버린 우리는 요즘 잔고장으로 몸살을 앓는 스쿠터를 수리하러 서비스 센터를 찾았다.

진단 결과 : 새 차를 사세요~

10년 전에 베스파를 샀는데, 동일 모델 가격이 200만 원 올라있었다.

고장 원인은 황당하게도, "너무 안 타서 엔진이 맛이 갔다."

동네바이크로 광안리 일대만 쏘다니니, 10년을 탔는데도 주행거리가 1만 킬로도 안 된다. 너무 안 타도 고장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부부싸움도 너무 안 하면.... 같은 교훈은 얻지 말자.


"새 오토바이를 사면 많이 타고 다닐까?"

"안 그럴걸?"

결국 베스파를 또 사는 건 의미 없다 결론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냉장고에서 오래전부터 뒹굴고 있는 미니 사케가 떠올랐다. 왠지 오늘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남천시장에 가서 회를 떠 왔다. 벌써 농어가 제철이란다. 예전에는 3만 원어치 회를 뜨면 3팩으로 나눠줬다. 둘이 먹기엔 회가 너무 많아서 나중엔 매운탕에 남은 회를 넣어 건져먹기도 했었다.

이제 5만 원을 떠도 두 팩만 준다. 매운탕을 안 먹으면 배가 차지 않는다.

사케를 따서 회와 같이 먹었다.

농어는 아직 제철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참기름과 마늘 듬뿍 넣어 만든 막장에 찍어 먹으면 맛있어...

얼마만의 낮술인지 모르겠다.

어제 대판 한 내용을 다시 상기해 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우린 이토록 오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서툴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알아가야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둘 다 조금 얼큰하게 취해서는 낮잠을 잤다.

저녁 대충 챙겨 먹고 광안리 해수욕장 산책한 후 목욕탕에서 남은 숙취를 다 털어내고 집에 돌아왔다.

이런 날이 삶의 양념이니까 부부싸움도 가끔은 해줘야... 같은 교훈은 얻지 말자.



9.

큐라이프의 <2025 성소수자 나이 듦 실용강좌>가 다음 주 월요일에 드디어 열린다. 처음 해주지 않겠습니까? 제안이 왔을 때, 저 같은 게 뭔 할 말이 있다고 부탁을 다 한대요? 놀라서 되물었다.

애인하고 20년 살았으면 할 말이 많은 거 아니냐, 또 묻길래, 없을 거 같은데...? 역시 물러섰지만, 어찌어찌 설득되어서 하겠다고 한 것이 3월이었나 그랬고, 그때만 해도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정할 시기인지라, 우리나라가 콰과광 돼서 어쩌면 영원히 내가 강의할 일은 없을지도 몰라, 생각했었더랬다.

다행히 한국인의 민주주의 열망이 우주를 감동시킨 덕에, 별다른 변경 없이 강연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강연제목은 이미 홍보물로 나갔지만, 내가 만든 소제목은

<게이 커플은 문서로 증명한다>

이다.

강연 내용을 원고로 쓰고 나서 챗지피티한테 피피티로 만들게 도와줘! 했더니, 자기가 알아서 소제목을 아래처럼 만들어줬다.


1. 우리의 짧지만 강렬한 연보

2. 동거의 시작, 그리고 '커플 모임'

3. 달콤하지만 쉽지 않았던 동거 생활

4. 불안정한 미래 속에서 오는 갈등

5. 경제공동체의 어려움

6. 처음 만든 우리의 ‘법적 문서’

7. 가족과의 교류, 그리고 커밍아웃

8. 십 년, 그리고 권태

9. 죽음과의 조우

10. 글을 쓰기 시작하다

11. 함께 변화해 가는 삶

12. 미국에서 결혼하기로 하다

13. 세 커플의 괌 결혼 여행

14. 오픈릴레이션쉽?

15. 우리의 오늘


해당 강연의 강사는 나와 다른 한 커플, 두 팀으로, 각각 강연시간을 1시간 배정받았다. 혼자서 한 시간을 어떻게 떠들어... 걱정했는데, 한번 시뮬레이션해 보니 얼추 시간을 맞출 수는 있을 듯하다.

오스씨와 나, 혼자 한 시간을 떠들어 댈 수 있을 만큼,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당일 날, 부디 우물쭈물하다 엉망진창 되지 않게,

우주의 힘아, 도와줘!


* 온라인 줌으로 하는 강연이니, 소제목이 마음에 드시는 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주최 측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도 안 들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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