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궐기(1)
1.
"새 오토바이를 사면 많이 타고 다닐까?"
"안 그럴걸?"
결국 베스파를 또 사는 건 의미 없다 결론지었다.
- 지난달 일기, 오월기(2) 중에서...
그런데... 샀다.
기존에 타던 스쿠터가 고장 나서 고치러 갔다가, 쇼룸 한켠에 반짝이는 녀석을 본 순간—끝이었다.
"사고 싶으면 사~"라며 슬쩍 등을 떠밀던 오스씨도 내가 진짜로 덥석 살 줄은 몰랐는지, "참~~~ 잘 지른다~"며 기막혀했다.
사장님 말로는 지금이 중고 스쿠터 잘 팔리는 시즌이라고.
사실 내 스쿠터는 엔진 고장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은 터라 고철값밖에 못 받겠다 싶었는데, “더 받을 수도 있어요~”라는 말에 그냥 홀랑 넘어갔다.
10년 전 같은 모델을 샀을 땐 200만 원쯤 저렴했는데, 이번엔 그 가격이 훌쩍 올라 있었다.
한 번 경험한 걸 더 비싼 값 주고 또 십 년 해본다고? 그건 ‘경험의 연장’이 아니라 ‘퇴보’ 아닌가!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한 단계 윗급으로 질렀다.
그리고는 오스씨에게 말했다.
“자기야, 지금 타는 그랜저가 아마 우릴 위한 마지막 좋은 차겠지? 마티즈, 소나타 거쳐서 그랜저 왔으니, 연금 생활을 하게 될 시기부터는 다시 경차로 내려가야 할 거야. 우린 외제차 한 번도 못 타보고 죽겠구나...”
이렇게 사연팔이를 하며, '외제차는 포기하더라도, 스쿠터만큼은 급을 좀 올리고 싶다'는 약간 천박한(?) 욕망을 결국 이해받았다.
그리고 2주 정도 지나 서류 작업을 마치고 드디어 새 스쿠터 '베지툐'(베스파 GTS125의 애칭)를 받았다. 예전 모델보다 비싸고, 편의사양도 많고, 무엇보다 ‘새 거’니까 출발부터 팡팡 잘 나간다!
신나서 달리던 중, 신호등 앞에 멈췄는데...
끼익— 1톤 트럭이 내 앞을 파고들며, 매연 폭탄을 뿜기 시작했다.
부산 오후 3시. 아스팔트 체감 온도 30도.
그래, 맞아. 이거였지. 이게 싫어서 복잡한 시내는 안 가고 가급적 동네에서만 탔던 거였지. 그래서 9년 동안 8천 킬로밖에 못 탄 거였지... (서비스센터 사장 피셜: “적게 타서 엔진 고장 났어요”)
차는 바뀌었지만, 더위도 매연도 그대로다.
이걸 또 못 견디면 몇 년 후엔 다시 실린더 사망 선고겠지.
기쁘다가 짜증 나고, 설렜다가 후회하고…
감정이 널뛰기했던 오늘, 새 스쿠터 받은 날이었다.
P.S. 기념으로 먹은 물회는 정말 별로였다. 이거… 징조는 아니겠지?
2.
헤드폰을 끼고 첼로 독주곡을 들었다.
저음 선율에 빠져드는 중, 갑자기 ‘쓰읍—’ 하는 숨소리.
어? 녹음이 왜 이래? 실수인가?
계속 들으려 했지만, 거슬리는 숨소리에 결국 멈췄다.
"녹음을 왜 이렇게 엉망으로 했대?"
짜증을 냈다.
지난달 첼로 독주회를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덩치 있는 남성 연주자가 포레의 Après un rêve를 연주하는데, 숨소리가 거슬리게 들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어머나, 저분 비염 있으신가...? 듣기 싫어...”
이어진 베토벤 첼로소나타에서도 반주 피아노랑 같이 달리는 부분에서는 잘 안 들리다가 아다지오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그 숨소리.
인터미션 때 오스씨에게 말했더니,
“나도 듣기 싫었어”라고.
궁금해서 '첼로 숨소리'로 검색해 보니, 활을 움직이는 품이 크니 숨소리가 섞이는 건 어쩔 수 없고, 그 숨까지 포함되어야 ‘진짜 라이브’라는 글을 봤다.
아, 그 소리는 ‘사람이 폐로 숨 쉬면서 내는 소리’구나. 연주자의 육체성과 연결되어 있구나.
깨닫자 순간 민망했다.
2부에 들어서 슈베르트의 Arpeggione Sonata가 시작됐고, 이번엔 ‘숨소리도 음악이다’ 생각하며 들었다. 그러자 훨씬 감미롭게 들렸다.
1부에선 ‘네 재주나 보자’ 식 관람 모드였다면, 2부에선 활의 방향을 따라 나도 흐느적거리며 함께 연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인식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달라지다니.
사람은 정말,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3.
올해도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가기로 했다.
작년엔 동대문 근처 저렴한 호텔에 묵었는데, 더위에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도 너무 힘들었고, 게다가 이상한 벌레에게 다리 전체를 물렸다.
그래서 올해는 아예 종로 2가, 퀴퍼 행사장 근처로 숙소를 예약했다.
“서울 숙소 가격 진짜 너무해. 이 돈이면 일본 가겠다...”
툴툴댔지만, 뭐 어쩌겠나. 숙소라도 가까워야지.
이제는 복장 고민!
작년엔 커플룩에 집중하느라 퀴퍼 특유의 화려함은 살짝 부족했었다.
특히 가방이 아쉬웠다.
그런데 퀴퍼 가면 또 살 게 산더미라… 가방을 안 멜 순 없다.
결국 올해도 같은 커플가방을 메게 될 듯.
이틀 안에 머리 싸매고 복장 고민을 마쳐야겠다.
4.
6월 초 연휴에 엄마와 누나 둘, 조카가 부산에 놀러 왔다.
“호텔 잡아야겠다, 우리 집 침구가 없거든.”
“바닥에 아무 데나 자면 되지~”라는 대답에 기가 찼다. 무슨 깔개도 없이 바닥에서 잔다고?
결국 인터넷에서 바닥요를 5만 원씩 주고 두 개 샀다.
두 사람은 바닥요, 두 사람은 소파에서 잤다.
그리고 가족이 떠난 후, 고스란히 남겨진 바닥요 두 개.
커서 옷장에도 안 들어간다.
당근에 올려놨는데, 여름이라 그런지 입질도 없다.
재활용 쓰레기로 버리면 개당 1만 원쯤 나온다니,
총 12만 원. 이걸로 2박 호텔값을 대체...
잠깐만… 이거, 광안리 숙소 가격 치고는 정말 싼데?
그렇다면 다음에도 이 전략을 쓰면 호텔비가 절약될지도?
... 지구야, 미안해.
PS : 이 글을 쓰자마자 홍예당 친구가 "저 필요해요!" 손을 번쩍 들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