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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혼란 속에서 로또처럼 얻게 되는 것들

유궐기(2)

by 선우비

5.

김멜라 작가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제 꿈꾸세요』로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던, 퀴어문학을 말할 때 레즈비언 작가로 늘 첫 손에 꼽히는 이름. 게이 작가가 박상영이라면, 레즈 작가는 김멜라. 그 정도로 유명한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글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읽고 싶은 게이 작가들의 책도 아직 너무 많아서, 김멜라는 늘 ‘나중에’ 읽을 목록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차,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부울경퀴어웨이브’라는 부산·울산·경남 지역 퀴어 활동가들이 '비온뒤무지개재단'의 후원을 받아 울산 ‘카페 숨’에서 북토크를 연다고 했다. ‘올타꾸나.’ 이제 읽어야 할 때가 온 거다.
도서관에서 『제 꿈꾸세요』를 빌려 들고 와선 이틀 만에 후다닥 읽어치웠다.(현장 구매로 사인받으려고...!)

카페 숨에는 일찍 도착했다. 북토크 전에 ‘퀴어문학을 말하다’는 사전행사가 있다고 하길래 부지런히 달려갔는데, 도착하자마자 들은 말은…

“그 행사는 취소됐어요.”

이유는 묻지 않았다. 현장 분위기가 좀 그랬다.

홍예당도 책 판매를 위해 부스를 차렸는데, 전날 모리가 그 일로 울산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냥 반가운 마음에 책을 한 권 사주려 했는데, “가지고 다니면 무겁잖아요. 나중에 사무실에서 사세요.”라는 다정한(?) 제지에 따라, 다른 부스에서 책을 샀다.

그렇게 사게 된 책들은...
김멜라의 에세이 『멜라지는 마음』, 부울경퀴어웨이브 활동가들이 쓴 『이응과 세모』, 그리고 사회를 맡은 김건형 평론가의 평론집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

북토크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오스씨는 김멜라의 책을, 나는 김건형 평론집을 펼쳤다.
사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누군지 몰랐다. 평소 평론을 자주 읽는 편도 아니고, 내 머릿속은 김멜라의 소솔 속 인물들로 이미 가득했으니까.

그런데 이 평론집, 꽤 좋았다.
퀴어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곳곳에 묻어나고, 작품을 세세히 분해해 자기 방식대로 다시 읽어내는 정성도 인상 깊었다. 1부를 통째로 다 읽을 만큼 집중해서 봤다.
비록 최근 퀴어소설은 많이 다루지 않았지만,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와 시선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김멜라를 보러 왔다가, 뜻밖의 작가 한 명을 더 데려가는 기분이랄까.

본격적인 북토크가 시작됐을 때, 현장에는 열댓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절반 정도는 행사를 준비한 활동가로 보였다.

‘이 정도의 작가가 왔는데, 이 정도 인원이라니…’
솔직히 아쉬웠다. 내가 작가였다면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선 꽤 호사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질문을 여러 번 해도 눈치 볼 필요 없고, 작가와 평론가를 꽤 오래 독점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이 적다는 건, 결국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가 얻은 게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평론가와의 만남, 그리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북토크의 시간. 소박하고 조용한 행사였지만, 내겐 큰 수확이었다.

앞으로 두 사람의 글을 좀 더 부지런히 챙겨 읽어야겠다.

사람이 적어 사인받기도 쉽고, 사진도 여러 번 박는 등, 어쩐지 너무나 사적인 인연처럼 느껴지니까.


6.

브런치에 글을 올리다 보면 가끔 별안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조용한 외딴섬처럼, 조회수도, 방문자 수도 그럭저럭 평화롭게 흘러가는 내 브런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방문자 수가 폭등한다.

"뭐지? 무슨 일이지?"
남의 집 불구경하듯 통계를 들여다보면, 의외의 글이 갑자기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평소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글이다.

이를테면 작년 여름, 갑자기 <비선대 코스>와 <비룡폭포 코스> 글의 조회수가 폭주한 적이 있었다.
뭔가 이상해서 알아보니, 여름휴가철이었다. 누군가가 포털에서 ‘속초 여행 코스’를 검색하다 내 글 제목에서 정보의 기운(?)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글들은 짧은 여행기 도입부를 제외하면 모두 나의 책을 은근슬쩍 홍보하는 판매유도글이었다.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도 그 두 글은 내 전체 글 중 조회수 1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글을 쓴 지 꽤 된, 심지어 거의 아무도 안 읽던 글 하나가 갑자기 인기글 5위로 치고 올라왔다.

그 글은 러시아 발레리노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나름 애틋한 추억담이었다.
그런데 포털에 검색해 봐도 그의 이름은 최근 뉴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유튜브에도 이변을 감지할만한 신상 영상은 없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네이버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쳐봤다.
그랬더니, 내 브런치 글이 맨 위에 뜬다!

‘아... 그래서...’

왜 내 글이 그렇게 노출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를 그리워하며 클릭했을 독자분들께는 또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불세출의 무용수에 대한 깊은 애도와 헌사 대신, 오직 그의 미모에 흥분한 어느 늙은 게이의 감탄사만 가득한 글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런 순간들을 통해 내가 얻는 인생의 지혜가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는 아니고,

捨即得(사즉득), 버려야 얻는다는 철학도 아니고,

그냥,
인생은 가끔 로또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어떤 글이, 누구에게 어떻게 닿을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도 무심히 써볼 일이다.



7.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퀴어>를 보았다. 상상마당 CGV 부산관에서 특별 상영을 한다는 소식에 미리 예매를 해두었고, 상영 전에 이경준 사진전 <원스텝어웨이>까지 함께 감상했다. 온종일 이미지가 뇌 속에서 폭죽처럼 터진 날이었다.

사실 <퀴어>에 대해선 이런저런 우려를 품고 갔다. 난해하다, 지루하다, 취향을 많이 탈 것이다, 이런 감상평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관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마주하니, 오히려 그 예측 불가능함이 좋았다.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감각. 긴장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몰입되었다.
오스씨는 화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았다고 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아름다운 화면을 볼 때마다 그 뒤에서 고생했을 수많은 스태프들의 손길이 떠올라 감동이 덜해지는 이상한 병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아름다움에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그 강렬한 이미지들은 마치 잔상처럼 계속 남았다.


영화가 끝나고도 마음 한편에 질문이 맴돌았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퀴어’일까?
소설 원작 제목이 그렇다지만, 영화엔 남자만 나오니, 게이라거나, 호모섹슈얼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이 단어가 지닌 독특한 결 때문일 것이다.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고, 심지어 잘 살기 위해선 결국 그 싫음마저 긍정해 내야 하는 고단함.

퀴어라는 단어는 그런 모순과 역설을 오롯이 품는다.

자긍심을 외치며 벽장을 박차고 나온 나조차도, 가끔은 나 자신과 동료 게이들을 보며 알 수 없는 짜증과 불편함을 느낀다. 영화는 그 복잡한 감정들을 다층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섬세하게 수놓아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새로 단장한 게이바에 들렀다. 유럽 게이바에서 보던 다크룸도 마련되어 있었고, SM 기구들이 장식처럼 늘어서 있었다. 한쪽에 놓인 강아지 마스크를 보며 장난처럼 서로 얼굴에 씌워주고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뉴욕 거리의 빛나는 순간들을 담은 사진전으로 시작해서, 007이 남자와 뒤엉켜 내면을 탐구하는 난해한 영화를 보고, 마침내 강아지 마스크를 쓰고 SM 놀이를 흉내 내며 하루를 마친다니. 참으로 퀴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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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산시향의 6월 정기공연은 온전히 쇼스타코비치의 밤이었다. 첼로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0번.

공연을 목요일에 봤고, 6일이 지나서 지금 글을 쓰려니 그때의 감상이 많이 흐려졌다. 협연한 첼리스트 최하영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 모습, 교향곡이 공식적인 연주시간보다 3분 이상 빨리 끝날 정도로 엄청나게 달렸다는 것, 그래서였는지 비올라 수석과 차석 활털이 비슷한 시기에 끊어졌다는 것이 번뜩 떠오른다.

첼로 협주곡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또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길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교향곡 10번에 더 오래 머물렀다.

이 교향곡에 붙는 해설은 언제나 스탈린의 죽음을 소환한다. 절대권력의 붕괴, 균열 나는 가치체계, 공포와 해방이 뒤섞인 혼돈의 시간. 스탈린의 죽음 자체도 하나의 신화처럼 남았다. 장례식장에 몰려든 인파 속, 수백 명, 어쩌면 천 명 넘게 압사했다는 괴담. '혼자 죽지 않고 수천 명을 데려갔다'는 섬뜩한 전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단숨에 운신의 폭을 넓히진 못했을 것이다. 후계자들이 살아 있는 한, 체제는 건재했을 것이고, 이름만 바뀐 공포는 여전히 공기처럼 감돌았을 것이다. 해방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직 저 멀리 있었다. 일제가 패망해서 물러나던 대한제국의 모습과는 여로모로 기쁨과 해방감의 강도가 달랐을 듯하다.

그런 불안하고, 한편으로 기대감을 내비치는 상태...라는 걸 (제멋대로) 감안하고 들었을 때 느낀 교향곡 10번의 감상은,

....... 좋지만 좋다고 왜 말을 못 하니...라는 느낌이랄까?

칠랄레팔랄레 춤곡으로 가득 채워도 좋았을 걸, 시종일관 묵직하고 우울했다. 앞으로 마구 달리는 듯했지만,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진달까?

스탈린의 죽음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해도, 이 음악에서 '해방의 기쁨'은 쉽사리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온통 혼란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원래 소시민들의 인생이 그렇다. 역사의 거대한 사건 속에 휘말릴 때 남는 건 기쁨이나 비극이 아니라 대개 복잡한 혼란뿐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우리는 그 혼란을 비로소 역사라 부르고, 때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왜곡해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혼란이 오히려 좋았다.

심지어 쇼스타코비치조차, 그래, 무려 스탈린이 죽었다는 그 순간 앞에서는 결국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그도 소시민처럼 당황하고 조심스러웠구나.

작곡가의 의도나 후배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엉뚱하고 멍청한 감상이지만, 뭐 어때. 그런 것도, 쇼스타코비치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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